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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정치

비암사가 왜 비암사인지 아세요?

by 참교육 2013.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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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全義面) 다방리에 있는 천년고찰. 비암사...!
11월 3일. 세종시 제 1기 블로그 기자단이 찾은 비암사는 천년 고찰답게 화려한 가을 옷으로 갈아 입고 있었습니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왜 절을 짓고 부처님을 모셨을까요?
 
불교가 이땅에 들어 오게 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재위 371~384) 2년인 372년으로, 전진(前秦: 315~394)의 왕 부견(符堅: 재위 357~385)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보내어 불상과 불경을 전하면서 부터라는 건 다 아는 사실입니다.    
 

                                                             <비암사 전경>

 

종교가 생겨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불교가 이땅에 들어 오기 전에도 자연을 숭배하고 태양신이나 조상신을 모시는 원시종교가 있었지요. 

 

종교란 자연의 위대함에 비추어 인간의 나약함을 극복하려는 마음에서 부터 비롯된 것임을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이 오늘날 불교를 비롯한 종교가 뿌리 내린 계기가 된 것이지요.  

 

'죽음'을 이기기 위해...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영원히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는 원초적인 욕망일 것입니다.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불교도 교주인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게 살고  내세에도 극락왕생하고 싶은 욕구가 불교라는 형식을 빌어 뿌리 내리게 됩니다. 오늘날의 불교는 구복신앙과 접목되면서 전성기를 맞게 되었지요.    

 

 

<비암사를 지키고 있는 800년 묵은 느티나무 - 이 거대한 느티나무는 수령이 800년이나 됐습니다. 800년 전이면 서기 1200년 경, 서기1200년경이면 최충헌의 집권시기 정도가 아닐까요? 몽고군이 침입한 게 1231년이니까 그 때부터 살았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날 분교를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과 다른 길로 가고 있다는 감을 지울 수 없습니다.

 

불교의 핵심 사상은 3법인 4성제이지요. 삼법인이란 “모든 존재는 변하고 있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과 “모든 사물은 실체가 없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와 “열반의 세계만이 고통이 없는 진리의 세계이다”라는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세 가지 명제로 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열반적정은 “모든 것은 괴롭다”라는 「일체개고」(一切皆苦)로 대체되어 말해지기도 합니다.


 

4성제란 《란아함경(阿含經)》에 나오는 원시 불교 가르침으로 불교 기본 교의 가운데 하나입니다. "제(諦 · Satya)"는 진리 또는 깨우침을 뜻하지요. 사성제는 "네 가지 높은 깨우침(Ārya: 높은, Satya: 깨우침)" 또는 "네 가지 고귀한 진리(Four Noble Truths)"라는 뜻인데, 고제(苦諦) · 집제(集諦) · 멸제(滅諦) · 도제(道諦)의 4가지 진리 또는 깨우침을 의미합니다. 흔히 이 네 가지를 간단히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 부르지요.

 

이러한 진리를 깨우치는 방법이 8정도지요. 깨달은 자, 부처가 되는 길이 이 8가지 실천덕목입니다.

  1. 정견(正見): 바르게 보기
  2. 정사유(正思惟) · 정사(正思): 바르게 생각하기
  3. 정어(正語): 바르게 말하기
  4. 정업(正業): 바르게 행동하기
  5. 정명(正命): 바르게 생활하기
  6. 정정진(正精進) · 정근(正勤): 바르게 정진하기
  7. 정념(正念): 바르게 깨어 있기
  8. 정정(正定): 바르게 삼매(집중)하기 

 


 <사진 설명: 탑이란 거칠게 말하면 부처님의 무덤이지요. 아니 사리를 모셔놓은 곳입니다. 탑파는 시대에 따라 다얀한 양식으로 나타나게 되지요. 흔히 통일신라시대 탑의 모양은 3층석탑이랍니다. 비암사 3층석탑은 신라양식을 빌려 고려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탑은 1960년 3층석탑 꼭데기에서 계유명전씨 아미타불 3존불상이 발견되어 국보 106호로 지정되었답니다.>  

 

욕망이 고통을 만들어 그 업보로 3도 6계를 윤회하는 세계.. 그 세계를 벗어나는 게 부처가 되는 길이거늘... 욕망에 눈이 어두운 중생들은 스스로 죄의 업보에서 벗어자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처가 되는 길... 8정도를 통해 6계를 벗어나도록 수도를 하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인데... 오늘날 불교는 '세상이 헛되고 헛되다'는 진리를 잊고 그 반대로 고의 원인이 되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찰은 화려하게 짓는 것도 고집멸도에 역행하는 길이 아닐까요?

 

부처님의 모습도 목불에서 철불, 금동불, 금불로... 자비로운 모습에서 근엄하고 위엄서린 모습으로 바뀌게 된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것은 종교가 권력과 결탁하면서 민간신앙인 구복신앙과 접목하면서 부터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권력이 필요로하는 종교. 그래서 종교는 종교가 가지는 본질적인 목적보다 권력이 필요로 하는 지배이데올로기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 증거가 바로 고려시대에 나타난 승과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현실이란 영생을 위한 수도의 과정이어야 하고 그래서 부처가 되기 위한 끊임없는 수행의 과정이어야 하지만 승려들에게 국사니 선사와 같은 품계를 주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불교의 변질은 민간신앙에서는 토속신앙과 결함함으로써 구복신앙으로 나타나게 되기도 했고요. 


 

 

인간의 욕망과 결합한 종교...!

 

그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불상의 모습에서도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서 백제후기의 작품으로 얼굴 가득히 자애로운 미소를 띄고 있는 서산의 마애삼존불상의 경우와 오늘날 일반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부처님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모습입니다. 

 

특히 거대한 부처님상을 만들고 서민들의 정서에 영합해 구복신앙을 조장하는 모습은 부처님이 원하는 불상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불교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않는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모습으로, 겉으로는 날이 갈수록 하려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가람 배치도에서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서론이 너무 길었습니다.

 

제기 이런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구복신앙. 특히 상업주의와 결합한 현세 구복적인 신앙을 부추기는 사찰과는 다르게 비암사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니 유명사찰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이 아닌 천년고찰을 그대로 보존하고싶어하는 스님들의 순수한 마음이 예스러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비암사 얘기를 해야겠네요.

비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입니다. 이 절의 뚜렷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극락전 앞뜰에 있는 높이 3m의 고려시대 3층 석탑 정상 부분에서 사면군상(四面群像)이 발견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석상 중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三尊石像)은 국보 제106호이고, 기축명아미타여래제불보살석상(己丑銘阿彌陀如來諸佛菩薩石像)과 미륵보살반가석상(彌勒菩薩半迦石像)은 각각 보물 제367호, 제368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비암사는 국보 1점, 보물 2점이 발견된 절로도 유명하지만.... 


 

                                              <사진 설명 :괘불탱화함입니다>


 

                                 <사진출처 : 문화재청 -- 괘불탱화(486×863㎝)입니다>

 

비암사에는 일년에 한번씩(매년 4월 15일)만 공개합니다. 그러나  괘불탱화(486×863㎝) 사본을 따로 만날 수 있습니다.

 

비암사 괘불은 석가모니의  영축산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든 청중들을 함께 묘사한 그림으로 석가모니의 설법 장면을 장엄하게 표현한 탱화입니다.

 

이 괘불탱화는 17세기 충청도지역의 대표적인 화승인 신겸이 여러 명의 화승들과 함께 그린 것입니다. 비록 화면의 상단부 일부가 없어져 다시 제작한 것이지만 남아있는 부분의 뛰어난 필치와 안정된 색감, 상승감을 유도하는 인물의 배치 등에서 17세기 괘불을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화기를 통해 조성연대와 시주자, 화승, 봉안사찰 등을 확인할 수 있어 동 시기 괘불 및 불화 양식의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리를 해야겠습니다.

 

비암사라는 절 이름이 왜 비암사라 부르게 됐는지 아세요?

 

옛날 이 절에는 비구니들이 거처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해질 무렵, 낯선 청년이 찾아와 밤새 탑돌이를 하다가 아침에 돌아갔습니다. 보통 방문객들은 아침에 찾아와 저녁이 되면 돌아가는데 이 청년은 저녁에 왔다가 새벽에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 청년은 탑돌이를 끝내고 비구니에게 물한잔을 청했답니다. 

 

궁금했던 비구니가 다른 사람과 다르게 저녁에 와서 밤새 탑돌이를 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사연은 있지만 말을 할 수 없다는 듯 빙그레 웃기만하고 돌아갔습니다.

 

궁금해 진 비구니가 이 청년이 가는 길을 미행을 했더니 산 속 커다란 바위 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비구니가 따라 들어갔더니 갑자기 청년은 간곳이 없어지고 청년이 사라진 자리에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청년이 사라진 그 자리에는 커다란 구렁이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놀라서 바라보고 있는 비구니를 향해 구렁이는 "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소원인데 100일동안 탑돌이를 하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탑돌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당신이 나의 모습을 보았으니 사람이 될 수 없어 평생동안 구렁이로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더라는 것입니다. 

 

그 후 비구니는 자기 때문에 평생동안 구렁이로 살아야 하는 비운의 구렁이를 위해 수발을 들며 함께 지냈다는 전설이 전해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절 이름이  비암사가 된 사연은 '뱀의 사투리' 즉 '비암'이 사는 절이라는 뜻에서 비암사라고 불리게 됐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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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지음/생각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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