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4·19혁명이 일어난 지 52주년 째 되는 날이다. 나라의 헌법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라고 명시하고 있지만 나라는 4·19혁명을 총칼로 뒤엎은 5·16쿠데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다.
헌법을 부정하는 세력들이 주인이 되어 노동자 농민의 주권은 자본이나 권력에게 저당잡혀 노예가 되어 살고 있는 나라. 52년 전 오늘 우리의 선배들은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에 분연히 떨쳐 일어나 목숨을 걸고 자유와 정의를 지켰다.
노동자와 농민은 물론 초등학생들까지 거리로 뛰쳐나가 자유를 지키겠다는 의거의 정신은 간곳도 없이 사라지고 권력 앞에 혹은 돈 앞에 정의도 헌신짝처럼 팽개치고 살아가는 사람들...
신동엽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다시 맞는 4·19혁명... 껍데기는 청산 되었을까? 독재자 이승만은 쫓겨났지만 이승만보다 더한 박정희가 나타나 헌법을 유린하고 합법적인 제 2공화국을 짓밟았다. 내일의 주인공이 될 이 땅의 청소년들을 지도하는 교사들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4월 혁명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학생들에게 혁명전개 과정이라도 알려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혁명 일지를 올려 본다.
< 4·19혁명일지>
2. 28. 민주혁명의 도화선 대구 경북고교생 수백명이 학원의 정치도구화에 반대하여 최초의 가두시위. 여기에 대구고등학교, 대구사대부고생 합류
3. 1. 3․1절 기념식에서 “3․1정신 받들어 대구학생 성원하자”는 유인물 배포
3. 10. 수원농고, 대전상고, 충주고 학생 “학원 자유”를 외치며 시위
3. 12. 부산 해동고교, 동래고, 혜화여고, 청주고 “공명선거” 외치며 시위
3. 14. 서울 환일, 용문, 중동, 배재, 선린, 경기, 대동상고생 공명선거 요구 시위
3. 15. 마산사태 발생. 자유당 표가 유권자 수보다 많이 나오는 부정선거 폭로됨
3. 17. 진해고교, 서울 성남고교생 부정선거 항의 시위
3. 24. 부산고교생 900명 조회시간에 전단 뿌리고 거리 시위
3. 25. 부산 동성중고, 혜화여고, 경남공고 거리 시위, 경찰과 육박전
4. 4. 전북대생 300명 전국 최초의 대학생 시위
4. 6. 서울 재야․정치 단체, 시민, 학생 4천명 시위
4. 11. 마산 김주열 학생 주검 발견. 시민 2만명 시위. 2명 사망, 14명 중상
4. 12. 마산상고생이 중심이 되어 시민 3만명 시위
4. 16. 청주공고생 전원 “불법 선거 무효”, “경찰 만행을 쳐부수자”며 시위
4. 18. 부산 동래고, 경남공고, 부산공고, 항도고, 청주공고생 시위
서울 고려대생 4천여명 국회의사당까지 시위, 귀교길에 정치깡패에게 폭행
4. 19. 서울대, 경희대, 동국대, 건대, 연세대 ,단국대, 국민대, 성대, 경기대, 한양대, 성신여 대, 서라벌예대, 홍익대, 강문중고, 동국중고, 대광중고, 동성고, 양정중고, 휘문중 고, 용문중고, 등 서울시내 대부분 중고대학생 거리 시위.
광주, 청주, 인천, 대구, 대전 등 전국적으로 부정선거 규탄 시위
4. 21. 소요사태 책임지고 국무위원 총사퇴
4. 22. “부정선거 다시하라”에서 “이승만 물러가라”로 구호 바뀌며 전국적 시위
4. 25. 서울시내 대학교수 258명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며 가두시위
4. 26. 서울시민 3만명 이승만 하야 요구하며 시위. 수송국민학교생 시위
이승만 하야 담화 발표
국회 3․15 선거 무효, 재선거 실시, 내각제 개헌, 총선거 실시 결의
4. 27. 남녀 63개 고교대표 257명 계엄사령부 방문하여 7개 요구 조건 합의
전국 대학생 대표 학교 복귀 결의, 질서유지반 편성 후 경찰에 배치
4. 28. 이기붕 일가 집단 자살
5. 03. 대학생들 학도호국단 해체, 학생회 탄생. 학원 민주화 운동 전개
5. 19. 4․19 희생자 합동위령제 거행
7. 29. 민의원, 참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압승
8월 윤보선 대통령, 장면 총리로 제 2공화국 출범
<배경 및 전개과정 요약>
1. 배 경
4 ·19혁명이 일어난 근본원인은 종신 집권을 노린 이승만 대통령의 지나친 정권욕과 독재성 및 그를 추종하는 자유당의 부패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평불만이 누적된 데 있음.
2. 전개 과정
(2․28 대구 고교생 시위)
1960년 2월 28일은 일요일이었다. 그러나 그날 대구에서 열리는 야당 장면 부통령 후보의 유세에 고교생들이 참여하지 못하게 하려고 각 학교에서는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영화관람, 토끼사냥, 졸업생 환송회, 졸업고사 등의 명목으로 학생들을 등교시켰다. 그 음모를 간파한 고등학생들은 경북고생들을 선두로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 ! 학원의 자유 보장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벌였다. 자유당 정권의 암흑통치 하에서 대학생 등 지식인들이 침묵하는 시대에 최초로 고등학생들이 앞장서서 국민저항권을 발동한 4 19혁명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바로 대구 2 28 고교생 시위인 것이다.
(3․15 부정선거)
1960년 3월 15일의 제4대 대통령 선거와 5대 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정권은 상상을 초월한 부정들을 저질렀다. 조병옥 야당 대통령 후보가 급서한 이후 세인의 관심은 부통령 후보인 이기붕과 장면의 선거에 있었다. 그러나 이미 민심은 저 멀리 떠나갔고 부패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폭력과 부정부패 밖에는 다른 길이 없었던 정권으로서는 ‘부정선거’가 당연한 선택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 자유당은 사전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3인조-5인조 투표, 야당 참관인 매수 및 협박 등의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까지를 동원했다. 이같은 2중 3중의 부정선거로 개표 결과 이기붕 지지표가 무려 95-97%까지 나오는 사태가 발생하자 이에 스스로도 터무니없다고 느낀 이승만은 당시 내무장관 최인규에게 득표율을 하향 조정하라고 하기까지 했다.
(1차 마산 의거)
투쟁의 봉화는 항도 마산에서 타올랐다. 이미 투표함에 사전 투표용지가 차있는 것을 발견한 야당 민주당 마산지구당은 3월 15일 오전 10시경에 ‘투표무효’를 선언하고 거리에 나섰다.
이에 절대 다수의 시민과 학생들이 호응하면서 출동한 경찰이 발포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경찰은 발포 사실을 숨기면서 배후에 공산당이 있다고 하면서 갖은 조작을 일삼았다.
(2차 마산의거)
3월 15일 시위시 실종된 김주열 열사(마산상고 1년)의 참혹한 시체가 마산 중앙부두에 떠오르면서 민중들의 분노는 다시 폭발했다. 양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경찰에 의해 바다에 버려졌던 김주열열사의 시체를 본 마산 시민들은 제2차 마산의거를 일으켰고, 이후 전국에서는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산발적인 시위들이 벌어졌다.
(4․18 고대생 시위)
드디어 침묵하던 대학생들 중에 제일 먼저 고려대생들이 일어섰다. 4월 18일 국회의사당 앞까지 진출하여 “마산사태 책임자 처벌, 행동없는 지식인을 배격한다” 등을 외치고 학교로 질서정연하게 돌아오던 고대생들을 경찰과 공모한 반공청년단 소속 깡패 유지광 등 100여명이 몽둥이, 갈고리 등으로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비참하게 쓰러진 고대생들의 모습이 실린 4월 19일 조간신문은 마침내 전국민적인 저항의 불길을 당긴 것이다.
(혁명의 날, 4월 19일)
아침에 대광고생들이 동숭로에 모여들어 “대학생 형님들 뭐하냐?”며 한 이후 서울대, 동국대, 성균관대 등 대학생들이 앞장서고, 시민들이 합세하여 경무대 앞까지 진출하면서 경찰과 밀고 밀리는 공방을 벌였다. 경찰은 발포를 하였고 이승만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4․25 대학교수단 시위)
계엄령의 공포분위기 속에서 이승만은 이기붕을 퇴진시키는 선에서 사태를 마무리 짓고 정권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였으나, 4월 25일 “학생의 피에 보답하자!”라며 백발이 성성한 노교수들을 앞세운 대학교수단 300여명의 시위가 그 야욕에 철퇴를 내렸다.
(이승만 하야 --- 민중의 승리!)
마침내 이승만은 이어지는 민중의 저항에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내고 12년간 지켜온 권좌에서 쫓겨났다.
< 4·19혁명의 의의 >
0. 186명의 고귀한 희생과 수많은 부상자들의 투쟁에 힘입어 자유당 정권의 몰락과 이승만의 하야를 가져온 4․19혁명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제대로 된 민주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불과 1년만에 정권욕에 불타는 박정희 등 소수 정치군인들의 5 16 군사 쿠데타에 의해, 이후 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독재 정치 시대의 막이 열렸던 것이다.
0. 역대 독재자들은 4․19 정신이 널리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명칭도 “혁명에서 의거로 또 운동으로” 깍아내리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고 심지어 5공 헌법에서는 4․19정신이 헌법 전문에서조차 삭제되는 등 4․19는 숱한 수난을 겪기도 하였던 것이다.
0. 그러나 4․19때 시작된 불의의 지배에 대한 국민저항의 정신은 이후 면면히 이어져 박정희 유신독재 반대 투쟁, 5․18광주민중항쟁, 6월 민주항쟁 정신으로 나타나는 등 우리 사회 발전의 초석이 되어왔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0. 문민정부 들어 비로소 ‘혁명’으로 격상된 4․19 혁명기념일을 맞아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4․19정신인 민주이념과 사회정의의 실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것이 그날의 의미를 되살리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4․19혁명은 완성된 게 아니다. 총칼로 무너진 미완의 혁명은 아직도 살아남은 자들에게 말한다.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드는 일은 ‘산자의 몫'이라고...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요, 모든 권리는 국민에게 있고 권리는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정신을 살리는 길이라고.... 일제잔재청산을 못한 건국이 외세에 짓밟히듯 5·16쿠데타로 짓밟힌 4․19 정신을 살리지 못하는 한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 아니라고....
<참고 웹 사이트>
1. 4·19혁명(http://100.naver.com/100.nhn?docid=84193) : 네이버에 올린 두산백과사전의 내용. ‘4 ·19혁명의 배경, 4 ·19혁명의 직접원인, 4 ·19혁명의 도화선, 4 ·19혁명의 전개과정, 4 ·19혁명의 의의’가 잘 정리되어 있음.
2. 국립4.19민주묘지(http://419.mpva.go.kr/) : 서울 강북구 수유동 위치. 묘역현황, 참배절차 및 4.19 민주혁명 소개, 안장자 검색
3. 4.19 민주혁명자료(http://library.419revolution.org/419/main.asp) : 4.19 민주혁명, 공식문, 사진자료, 동영상자료, 보도자료, 발간자료, 발췌자료, 공개자료 등이 있음
4. 4.19혁명기념도서관(http://library.419revolution.org/) : 도서관소개, 이용안내, 키워드, 일치 및 분류 등 도서검색 제공.
5. 역사다시보기- 하나, 4·19 혁명 (http://www.kdemocracy.or.kr/Minju/Minju2_PDS/minju2_MediaPDS_view.asp?bid=pds_vod&num=28&page=5&od=&ky=&sh=)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역사다시보기 일환으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영상물을 제작한 것. 이승만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에 관한 영상임. 기획-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작-MBC프로덕션, 상영시간- 20분
6. 4.19 민주 혁명회(http://www.419revolution.org/) : 4.19 혁명 부상자회, 희생자 유족회, 기념관, 국립묘지 등 관련 기관, 단체 안내
이 기사는 '참교육마당'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 이미지 출처 : 다음 이미지 검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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