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운동의 대부 김근태님이 타계하셨다. 1985년 9월 고 김근태 통합민주당 상임고문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년)의장 시절,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이근안경감에게 차마 사람으로서 당할 수 없는 악랄한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한 후유증을 앓다가 올해 64세로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 1988년까지 김근태님을 고문했던 '고문 기술자' 이근안 전 경감은 목사가 되어 지금은 진리를 외치고 사랑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9월4일 각 5시간씩 두 차례 물고문을 당했고,9월5일,9월 6일 각 한차례씩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골고루 당했습니다. 8일에는 두 차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본인은 알몸이 되고 알몸상태로 고문대 위에 묶여졌습니다. 추위와 신체적으로 위축돼 있는 상태에서 본인에 대해 성적인 모욕까지 가했습니다. 말씀드리면 제 생식기를 가리키면서 "이것도 좆이라고 달고 다녀? 민주화 운동 하는 놈들은 다 이따위야!" 이렇게, 말하자면 깔아뭉개고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고문을 할 때는 온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눕히면서 몸을 다섯 군데를 묶었습니다. 발목과 무르팍과 허벅지와 배와 가슴을 완전히 동여매고 그 밑에 담요를 깝니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 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하면서 전기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와 (이때 방청석에서 울음이 터지기 시작, 본인도 울먹이며 진술함) 이때 마음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으며 이러한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인간적인 절망에 몸서리쳤습니다.,,,,
- 김근태 고문의 법정진술 중에서 -
김근태고문이 대공분실에서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한 수기, '남영동'을 읽으면 소름이 끼친다. 사람이 어떻게 그토록 잔인한 짓을 할 수 있을까? 당시를 살아 보지 않은 사람은 군사정권이 저지른 잔인한 폭력을 필설로 차마 다 전달하기 어렵다. 권인숙성고문사건을 비롯해 삼청동 지하에 끌려가 멀쩡한 사람이 고문을 당해 병신이 되거나 죽어나가기도 하고 개처럼 짓이겨 지기도 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이 지난 날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지켜내겠다는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해 줬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암흑의 시대, 박정희 유신정권과, 광주시민을 무참히 학살한 전두환, 노태우시대를 우리는 공포의 시대 암흑의 시대라 한다. 한반도 반쪽이 최루탄연기로 뒤덮이던 그 때,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권력으로 가장한 폭력이 얼마나 인간을 처절하게 망가뜨릴 수 있는가를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인간의 탈을 쓴 무리들은 주권을 말하고 진실을 말한다는 이유로 잡아다가 물고문, 전기고문을 가하고 잠을 재우지 않는 등 멀쩡한 사람을 병신을 만들어 놓기 다반사였다. 김근태고문 혼자만이 당한 얘기가 아니다. 생사람을 잡아 간첩을 만들어 처형하기도 하던 인간의 얼굴을 한 악마...
그들이 도대체 누굴까? 그들은 다름 아닌 오늘날 국회의원 중에도 있고, 이 나라의 지도자로 존경을 받는 인물 중에도 있다. 거짓말 같은 사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민중을 짓밟은 가해자들이 다름 아닌 한나라당이 안니가? 민족지 운운하는 조중동이요, 보수로 위장한 수구세력들이 아닌가?
군사정권의 후예들,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들을 왜 사람들은 못 잊어 지지하고 연연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이데올로기에 세뇌당해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침이라는 이데올로기...
경제를 살린다는 이데올로기...
안정이라는 이데올로기....
빨갱이라는 이데올로기...
농사를 짓는 농민들도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쫓겨난 빈민들도 성장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된 노동자들도, 아이들을 가르치던 선생님들도 거리로 뛰쳐나가 민주화를 외쳤던 게 1980년대다. 민주주의가 얼마나 그리웠으면 생활의 터전을 박차고 민주화를 외치다 감옥으로 혹은 수배자가 되어 쫓기며 살아 왔을까?
김근태고문의 타계 소식을 들으며 필자가 겪었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난다. 교육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포승줄에 묶이고 수갑을 채운 채 제자 앞에서 제자와 함께 취조를 당했던 아픈 기억이다.
‘선생들이 아이들이나 가르치지 않고 무슨 데모냐?’고... 욕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최루탄으로 뒤덮혔던 당시의 학교에는 군사문화의 잔재가 여학생들에게 군사훈련까지 시키며 교과서는 온통 지배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참다못한 교사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가 2000여명이 교단에서 쫓겨났다. 이런 잘못을 항의하러 교육청에 교육감을 면담하러 갔다가 교육감의 고발로 잡혀 포승줄에 수갑을 채우고 검사 앞에 조사를 받으러 갔던 일이 있다. 평생 거짓말도 잘 못하고 아이들과 교실을 쳇바퀴 돌듯 살던 사람이 유치장에 교도소에 끌려 다니다 잡혀 간곳....
“선생님~!”
당시에는 여상을 졸업한 제자들이 취업해 간 곳은 은행을 비롯해 기업체와 생산현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 타자를 잘 치는 학생은 법원이나 검찰청에도 취업이 됐던 것이다. 제자 앞에 수의를 입고 포승줄에 꼴꽁 묶여 수갑이 채워진 모습으로 나타난 선생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안절부절 못하고 들락거리던 제자,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기막힌 일은 내가 들어 간 검사실에는 웬 앳된 여성이 나와 마찬가지로 포승줄에 묶인 채 수갑을 채워 의자에 중죄인처럼 앉아 있었다. 이 여자! 나를 본 순간 “아~ 선생님!” 그 죄인도 내가 재직하던 학교의 졸업생이었다. ‘미제 침략사’라는 책 한 권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잡혀 온 노동자 제자.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을 잡아야하는 승진도 하고 출세를 할 수 있는 실적 때문에 가택수색을 하다 나온 미제침략사'라는 책 한권... 그 책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이적찬양고무죄’로 잡혀 왔던 것이다.
김00 검사. 이름도 잊을 수가 없다.
“오늘 잘 됐군. 사제지간에 심문하번 해 보자!”
그 징그러운 웃음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인간백정 이근안은 목사가 되어 사랑을 말하고, 당시 민주주의를 짓밟던 판검사와 경찰 고위간부, 조중동, 한나라당은 아직도 이 땅의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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