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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중 사교육비가 채 5만원이 안 되는 아이와 1000만원을 호가하는 '풀 코스 교육'을 받는 아이의 교육 양과 질의 차이는, 두 아이가 먹는 이 한 끼 점심 메뉴가 그대로 말해 준다. 사교육비 비율 '1000 : 5', 때로는 '1000 : 0' 인 대한민국의 방학'
오죽하면 서울대 김대일교수는 ‘대한민국에서 빈곤한 이들이 끔찍한 가난의 늪에서 벗어날 확률이 고작 6% 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했을까?
지난 2002년 토리노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경기에서 국민들이 안톤 오노의 손을 들어준 심판에게 분노 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규칙이 무너진 경기였기 때문이다. 규칙이 무너진 경기. 그건 경기로서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쇼트트랙경기뿐만 아니라 사회도 마찬가지다. 규칙(법과 도덕...)이 무너진 사회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계층상승의 통로가 되는 교육이 '1000 : 5', 또는 '1000 : 0'으로 불공평하게 기회가 주어졌다면 이는 사회가 지켜야할 최소한의 기준(규칙)이 실종됐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실이 무너졌다’느니 ‘학교는 죽었다‘는 얘길 자주 듣는다. 교실에서 수업을 하기 어렵다는 게 교사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학교가 왜 무너지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학교가해야 할 일을 못하기 때문이다. 학교가 존재해야할 이유가 무엇일까? 학교가 해야 할 본질적 기능은 교육이 ’계층상승의 수단‘이 아니라 ’삶의 지혜를 전수‘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학교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서 ’삶의 지혜를 전승하는 곳‘이 아니라 부모의 경제력으로 자녀의 사회적 신분을 대물림하는 절차나 과정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를 학벌사회라고들 한다. 학벌사회란 학업경쟁력이 아닌 학벌(간판,브랜드밸류)에 의한 신분이 세습되는 사회를 말한다. 서열을 본질로 하는 우리사회의 신분이란 수학능력점수에 따라 매겨진다. 이 서열 매김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은 규칙이 무너진 게임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시합 전 승패가 결정 난 이러한 신분사회, 학벌사회를 가능케 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사회가 학벌사회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육이 파행적으로 치닫고 있는 이유도 학벌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 교육위기의 근본원인도 학벌에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의 패거리 문화가 정치, 경제, 사회문화 등 각 영역에서 뿌리를 내리고 부정과 부패를 가능케 한 사회구조도 학벌에 있고 이를 재생산하는 대학서열화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실붕괴 뿐만 아니다. 기러기 아빠며 천문학적인 사교육시장이며 교육 붕괴 등 오늘날 우리교육이 당면한 모순의 원인이 학벌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정과 부패구조의 원인 제공자요, 사회진보와 교육위기의 주범인 학벌이 유지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학벌은 식민지시대에서 그 뿌리를 찾아야 할 것 같다. 민족을 배신한 대가로 얻은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이 해방과 함께 위기를 맞자 이들의 힘이 필요한 불의한 정치권력이 야합하고 여기서 이루어진 세력이 학벌을 통하여 뿌리는 내릴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다. 그 후 독재 권력이나 군사정권이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고 정당성이 없는 권력의 지지 세력으로 기생하면서 공생관계로 살아남게 된다.
이들의 생존 방식도 재벌로 또는 사학으로 언론권력으로 연결되면서 거대한 세력으로 뿌리내리게 된 것이다. 사회정의가 무너지고 정경유착이니 권언유착이 가능한 사회구조는 이러한 학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독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법으로 흔히 3S 정책이 동원되기도 한다. 교육이 실종된 사회는 자본에 종속되기도 하지만 독재 권력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했을 때 그로부터 도래할 수 수 있는 피해란 상상을 초월한다. 독재 권력이 존속되기 위해서는 침묵하는 국민이 필요하다. 국민의 비판을 거세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 국정교과서제다.
권력이 특히 정당하지 못한 권력이 국정교과서의 편성권을 장악한다면 그 교과서는 그들의 기준에 의해 선정된 지식이 고급지식이 된다. 특히 입시위주의 사회에서 그들이 선정한 지식만이 가치를 인정받게 되고 이러한 교육의 결과는 그들이 원하는 인간 양성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해방 후 ‘대학별 단독시험’으로 시작한 대학입시제도는 현행 입시제도까지 무려 11차례나 바뀌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연례행사로 치러진 입시제도 바꾸기는 무엇을 말하는가? 대부분의 정권들은 명운을 걸고 이뤄내고야 말겠다는 교육개혁을 약속했지만 그 어떤 정권도 그 일을 해 내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교육개혁은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 같다. 참여정부가 교육개혁위원회를 만들고 국민적 기대를 모았지만 정권중반에 접어든 현재까지 교육개혁은 가능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교육개혁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회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우리사회는 진보와 보수가 아니라 ‘개혁과 반개혁’, ‘민중대 반민중’의 대립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정의나 불의가 아니라 기득권세력과 개혁을 추진하는 세력간의 힘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반세기가 넘게 기득권 수호세력들은 정치, 경제, 사회문화 종교 등 각 영역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 이러한 개혁저항세력들은 이번 사립학교법 반대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부정과 부패비호세력이라는 오명도 불사하면서 이들의 기득권 지키기는 파렴치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상위 2%가 부와 권력을 독점해 98%를 지배하고 세습하는 구조는 입시라는 과정을 거쳐 정당화되기도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방학 중 사교육비가 채 5만원이 안 되는 아이와 1000만원을 호가하는 '풀코스 교육'을 받는 아이가 일류대학을 입학할 가능성을 비교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얘기다.
학교가 시험 준비기관이 되고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질이 다른 사교육을 받아 기득권을 계승하는 구조는 이렇게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것이다. ’세계 10-20위 수준의 학생들을 싹쓸이 해 뽑아놓고 4 년 후에 세계 150위 수준의 학생으로 만들어 배출하는 서울대‘가 있고 승패가 결정 난 경기를 정당시키는 사회제도가 유지되는 한 교육의 기회균등이란 헌법의 명문규정에나 남아 있을 뿐이다.
20대 80이라는 사회양극화현상은 개인의 능력 차라기보다 근대화과정에서 우리사회가 만든 구조적인 모순의 결과다. 사화양극화를 정당화하고 가난이 개인의 책임으로 또는 운명론으로 인식하게 된 풍토 또한 왜곡된 교육과 무관하지 않다.
사회를 보는 시각이나 판단능력이 중시되지 않고 암기한 지식의 양으로 사람의 가치와 서열을 매기는 학교교육이 바뀌지 않는 한 사회양극화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해야할 입장에 있는 정부조차 힘의 논리에 바탕을 둔 신자유주의 경쟁이데올로기를 고수하고 있다.
사회양극화나 신분의 세습을 혁파하기 위해서는 실종된 교육을 살려야 한다. 학교가 더불어 사는 지혜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출세를 위한 경쟁장이 되는 한 진정한 교육, 인간 교육은 불가능 하다. 겉으로는 사회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겠다면서 또 평준화의 틀을 유지하겠다면서 수월성을 말하고 특목고나 자사고를 확대하고 시장개방과 영어몰입교육까지 불사한다면 교육의 공공성회복은 불가능하다. 철학이 없는 사회는 부패하기 마련이다. 진정한 교육의 기회균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학벌문제와 입시구조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교육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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