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에 주관이 섞이면 학문으로서 생명은 끝이다. 자연과학뿐만 아니다. 인문학도 객관적인 냉정을 상실하면 학문으로서 가치를 유지하기 어렵다. 이런 상식적인 수준의 진리도 삶의 현장에서는 남의 얘기처럼 생소하게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언론을 보자. 언론은 세상의 거울일 때 가치가 있다. 그런데 거울이 아닌 언론이 거울 행세를 하면서 정작 비춰야할 곳, 보여 줘야할 곳을 가리거나 왜곡된 상을 보여 줘 거울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바보로 만들 때도 있다.
지식기반사회에서 진실을 안다는 것은 참 어렵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뚜껑을 한 번 열어보자. 그 속의 부품들이 무슨 역할을 하는 지, 그 부품들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 지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알 길이 없다. 지구촌 어느 구석에서 일어나는 일을 몇 분 후에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알 수 있는 시대에 살지만 그 전달 매체가 과연 편협 됨이 없이 객관적인 진실을 알려 줄까? 매체를 통해 전달된 사실이 ‘객관적인 진실’이라고 믿어도 좋을까?
위선자일수록 더더욱 진실의 가면을 쓴다. 화장술이며 가면술이 뛰어난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위장하는 사람보다 가면을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이 바보일까? 불신의 마술에 걸렸다고 의심 받을지 몰라도 우리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하나같이 이해관계나 이데올로기라는 가면에 감춰 있다.
상업주의라는 마술이 진실을 가리고 이익이 되는 게 선이라는 가면으로 위장하고 있다. 정치며 경제며 언론이며 예술조차도 순수함과는 거리가 먼 이해관계나 가치관에 다라 다른 모습으로 비춰지고 전달되는 것이다. 화장술이 발달해 못난 사람도 미인으로 보이듯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현실은 언제부터 인가 사람들에게 진실로 다가가기보다 위장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이다.
TV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사전에 분장실에서 화장을 하고 화면에 등장한다. 개인을 더 아름답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PD가 원하는 화면을 얻기 위해서다. 엄밀하게 말하면 화면에 비춰진 얼굴은 사실과는 많이 다르다. 그러나 드라마와 현실을 구분 못하는 수준의 시청가가 존재하는 한 가해자는 오히려 천사로 둔갑하는 마술에 걸릴 피해자는 끊이지 않고 양산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정치는 전근대성을 벗지 못하고 피해자가 가해자 편이 되기도 하고 언론은 객관적 사실보다 이해관계로 분장한 왜곡된 현상을 진실로 분장해 천사로 둔갑해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주관에 얽매여 사는 사람은 이해관계에 따라 흔들리며 산다. 철학이 없는 교육자는 피교육자를 대상화시키기도 하고 이상을 잃은 시민운동가는 조직이기주의자로 변신하거나 운동을 출세의 발판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사이비 정치인, 신을 팔아먹고 사는 종교인, 거짓현상을 진실로 분장하는 언론인..
하나같이 과학이라는 가면 덕분에 본색을 감추며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결국은 순수한 사람, 정직한 사람이 피해자로 남는다. 정보화사회에서는 객관적 진실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창고 속에 처박힐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 순진한 사람이 진실게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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