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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관련자료/입시

우리나라 입시제도 변천사

by 참교육 2023.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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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19번이나 바뀐 '대입제도 흑역사'

우리나라는 지난 1954년 교육과정 고시를 시작으로 총론만 10차례 개정하고, 대입제도는 정부 수립 이후 무려 18번 개정안을 포함하면 19번째다. 4년에 한 번 꼴로 바뀌는 셈으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입제도도 바뀌었다. 입시없는 교육은 불가능한가? 입시제도가 왜 바뀌는가? 이 지구상에는 우리나라 수학능력고사나 일류대학이 없는 나라도 많은데 왜 우리는 학교가 학생들을 시험풀이 기술자로 만드는 주객전도의 반교육을 하고 있는 것일까?

1. 학교관리제(19451950)

8 · 15광복 후, 중등학교의 입시제도에 관한 문제가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은 1946513일에 개최된 각 시 · 도 학무과장회의에서였다. , 해방 직후에는 중학교장의 관리하에 필답시험성적과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의 내신서에 의하여 선발하였다. 내신서에 의한 평가는 정확성과 공정성을 결한다는 사회여론이 비등하여 이를 폐지하였다.

그 후 한 때는 출신학교장의 추천서, 면접시험 및 신체검사 결과를 종합해 참작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점차 입학시험 성적에 의해서만 선발하였다. 이 시기는 중학교가 집중되어 있는 도시에서는 전 · 후기로, 농촌에서는 전기에 준하여 실시하였는데 이에 대한 논란도 많았다. 이 시기의 문제점으로는 해마다 학교별 시험문제의 누설되거나 시험문제의 적부와 선발의 공정성이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때부터 지원자의 대부분이 일류교로 집중되어 입시지옥이란 말이 생겨났다. 또한 입시준비 교육으로 인하여 학생의 신체적 발육이 저해되며 학교에서는 지 · · 체를 겸비한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육에만 치중하므로 덕과 체는 도외시되는 절름발이 교육이 행해졌다는 비판이 대두되었다.

2. 국가연합고시제(19511953)

1950년 초는 새 교육법에 의해서 학년 초를 종래의 9월에서 4월로 바꾸기 위한 과도적인 조치로 6월에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 달도 못되어 6 · 25전쟁이 일어났고, 9 · 28수복이 있었지만 피난민들이 자기 집으로 찾아 들기도 전에 1 · 4후퇴로 다시 피난 길을 떠나는 바람에 학교는 제대로 수업이 될 리가 없었다.

이렇듯 부산 피난시절에는 학생 거주지의 유동, 수업진도의 어려움 뿐만 아니라 종래의 학교관리제의 폐단이었던 정실입학 · 부정입학 및 관리상의 불공정성 등 제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국가적 규모의 고사방법으로 구상한 국가연합고시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 국가연합고시는 전국 학교가 동일 출제로 시험을 치르고, 그 성적에 따라 선발하였는데 1954년까지 3년간 실시하다가 다시 학교관리의 자유출제제로 환원되었다.

이 제도가 공정한 입시에 공헌했다는 일반적인 반영과는 달리 권력층의 후문 입학의 길은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렇듯 장점도 있었지만 많은 문제점이 생기게 되어 사회적 비판으로 1953527, 51차 중앙교육위원회에서 폐지하기로 결정하였다.

3. 내신 · 필답합산제(19541956)

1954년부터 국가연합교시제에서 학교단위관리제로 다시 환원되었다. 국가연합고시제도는 1 · 4후퇴로 피난학생의 범람과 사회적 혼란 중에서 감행된 획기적인 방법이었으며, 또 입시의 공정성을 위한 공이 컸었다. 그러나 19538월 서울환도가 이루어지고 민주질서가 회복되면서 국가연합고시제는 점차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학생의 입학에 관한 권한은 법으로 학교장에게 맡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중학교의 입시제도는 학교관리제로 환원되어 유시험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교부는 입시준비교육의 과열을 방지하기 위한 방안으로 내신서에 의한 무시험전형제도를 장려하였다. 이렇게 해서 유시험 · 무시험을 병행할 수 있었으나, 문교부의 권장에 따라 많은 학교에서 무시험제도를 택했다.

4. 무시험전형제 · 연합출제병행제(19571961)

학교관리에 의한 유시험과 무시험제에 따른 시비와 더불어 과열된 입시준비교육의 폐단은 많은 논란을 격화시키면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1958년부터는 완전 유시험제도, 일부 무시험제도, 완전 무시험제도가 동시에 실시케 되었다.

이때 유시험제도를 택하는 경우 몇 개교가 연합해서 출제하였다. 또 문교부는 유시험제도를 택하는 경우 지역별, 또는 선발기별로 학교장이 자진하여 연합출제 하는 것을 권장하였다. 이것이 바로 연합출제제인데 1961년까지 실시되었다. 그리고 학교단위로 유시험를 택할 수 있었으나 유시험의 공정성을 높이고, 무시험의 불신요인을 방지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학교는 연합고시제를 택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1958년의 입시는 많은 시 · 도의 경우 단기별(單期別) 실시, 무시험제 전형제, 공동출제라는 3가지 원칙을 적용하였다. 그런데 1959년부터는 단기제의 폐단을 해소하기 위하여 전 · 후기별로 나누어 적용하는 외에 큰 변동 없이 1961년까지 시행되었다. 그러나 연합출제제도는 유 · 무시험 병행의 학교관리제가 빚게된 많은 문제점은 해소하였지만 이 제도 역시 좁은 문을 합리적으로 운영할 수 없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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