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늦은 시간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취재파일 4321'(KBS 20시 20분~23시)을 보았다. '보도지침' 이야기와 이어서 '땡전뉴스('땡' 하는 시보소리와 함께 '전두환 대통령께서...'는 하는 뉴스가 나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에 대한 해설을 들었다. 언론이 언론의 기능을 못하고 권력의 시녀가 되면 어떻게 되는가를 일깨워주는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생각되었다. 박정희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출세의 기회를 엿보던 보안 사령관 전두환은 10·26사건을 계기로 12·12 쿠데타를 일으킨다. 18년 간 군사독재의 폭압에서 맞은 '80년 민주화의 봄'을 자신의 야망을 위해 총칼로 짓밟은 것이다. 국민의 눈과 귀를 막은 보도지침은 우리 역사에 두고두고 잊어서는 안 될 언론 역사의 치욕이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동물의 왕국'이 생각났다. 아이들이 가장 즐겨 보았고 그 프로그램이 교육적이라고 아이들에게 보기를 권장했던 프로그램이다. 동물의 왕, 밀림의 지배자. 사자의 위용과 자연의 신비를 이 프로그램을 통해 만끽할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지금도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골고루 즐겨보는 프로그램이다. 순수한 의미에서 보면 그냥 재미로 보고 지나칠 그런 내용이다. 그러나 세상은 순수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순수하지 못하다. 전두환은 왜 88서울 올림픽을 유치했을까? 올림픽을 개최해 경제적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일까? 광주시민을 무참하게 학살한 전두환이 국익을 위해 올림픽을 유치했다고 믿고 싶지 않다. 3S정책으로 불의한 집권을 유지하려했던 전두환은 올림픽을 유치해 국민들의 눈을 정치에서 스포츠로 돌리려 했던 것이다.
'개구리 왕눈이'와 '은하철도 999'는 일본의 이데올로기가 전혀 담겨 있지 않은 순수한 작품일까? '카루타'라고도 하는 화투(1543년 포루투갈 상인에 의해 최초로 일본에 전래된 서양의 카드)에는 그냥 순수한 재미만 담겨 있는 게 아니다. 송학(松鶴)은 일본에서 설날부터 1주일동안 조상신과 복을 맞이하기 위해 대문 양쪽에 소나무를 꽂아두고, 학 그림을 걸어두는 일본의 전통을 담고 있다. 매화는 일본의 국화인 벚꽃이 피기 전인 2월경 일본 전역에서 축제를 벌일 만큼 일본인에게 친숙한 꽃이며, 벚꽃은 일본의 국화이며, 3광 아래에 있는 '만막'은 일본에서 벚꽃축제를 나타내는 휘장이다. 오동과 봉황은 일본왕의 도포에 쓰일 정도로, 강력한 왕권을 상징하며, 비광의 갓을 쓰고 있는 사람은 일본의 3대 서예가중의 한 사람인 오노도후(小野道x, 894~966)다. 자국민에게 금지한 화투를 왜 식민지 백성에게 보급했을까?
해방 50년이 되도록 '황국신민화'의 '국민'을 따 초등학교라는 이름대신 '국민학교'로 쓰였던 것은 우리 기억에 생생하다. 학교에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학교장 훈화'며 '주번제도'며 ''교문지도'가 조선학생을 보다 더 일본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동'자가 들어간 동중학교는 일본인 자녀가 다니고, 기우는 태양의 '서'자가 들어가는 서중학교 조선인 학생이 다니는 학교이름에 붙여졌다.
일본인의 이데올로기가 놀이 감인 화투에까지 침투했다면 동물의 왕국에는 수수한 예술정신만 담겨 있을까? 사자가 미국이고 얼룩말을 비롯한 사자의 먹이가 되는 동물은 약소국이라면 힘 센 사자에게 작은 동물이 먹이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힘의 논리'가 숨겨 있는 것은 아닐까? 동물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힘의 논리가 자연계의 정당한 질서라면 그런 먹이사슬이 유지되기 위해 '힘이 약한 동물은 희생되는 게 당연하다'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강한 자에게 복종하는 게 미덕이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힘있는 자의 편에 서는 게 정당화되는 논리는 강자의 논리다.
'순수하다'는 것은 순수한 사회에서나 통하는 논리다. 그러나 일방의 희생으로 상대방에게 반사이익이 돌아가는 현실에서는 '약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논리'다.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을 내놓아라'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약자의 끝없는 희생을 강요한 주장이 아니다. 오른 뺨을 때리고 맘 아파하는 사람에게 확실하게 반성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대안이다. 순수성이 없는 이해관계로 얽힌 사회에서 자신의 희생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현상이 아닌 본질을 이해하는 게 살아남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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