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어떤 분일까? 가톨릭(천주교), 기독교, 그리스정교회, 이슬람교...는 같은 야훼라는 신을 믿는 다른 종파들이다. 가톨릭이 종교개혁 후 갈라진 개신교만 해도 넉넉잡아 50개 종파가 넘을 것이다. 기독교는 왜 이렇게 종파가 많을까? 그 원인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예수라는 분이 하느님인가 아닌가에 따라 나눠진 것이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를 하느님으로 믿는 기독교 신자들은 같은 하느님을 믿고 있는 것일까?
<사진 자료 : 오마이뉴스에서>
뉴스위크지가 미 중앙정보국(CIA)과 세계 각국 통계자료를 기초로 해 작성한 종교분포를 보면 세계 인구 64억5300만명 중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그리스도교인은 21억3300만명이다. 아마 확실한 통계치는 알 수 없지만 그리스도교도 2억 수천만명 중 ‘같은 하느님’은 믿는 신자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왜 그럴까? 중학교 1학년 때 우연히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내가 만난 하느님의 경우의 예를 들어 보자.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나의 신관(神觀)에 따라 하느님은 같은 분이 아니었다. 다른 신자들은 어떨까?
친구 따라 간 교회. 그 교회가 천주굔지, 그리스도굔지 또 그리스도교라면 예수교 장로교인지 기독교장로교인지, 감리굔지, 제7일 안식교인지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알리도 없었다. 목사님을 통해 가끔씩 들은 하느님은 어떨 때는 ‘야훼하느님’이라 했다가 어떨 때는 ‘성자(예수) 하느님‘이라 했다가 어떨 때는 ’성령 하느님‘이라고 표현해 어떤 분인 진짜 하느님인지 알 리가 없었다.
중학교 1학년이 교회에서 처음 만난 하느님은 ‘전지전능하고 우주를 창조하신 무서운 하느님이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전능하시기 때문에 하늘이나 땅이나 땅 속 어디에 있는 사람의 마음 속 생각까지 샅샅이 알고 계시는 분이라고 알았다. 그런데 궁금한 건 ‘전능하신 하느님이시라면 왜 가난하고 병들고 억울한 사람들을 그냥 두실까?‘ 또 ’어떤 사람들은 귀하게 또 어떤 사람들은 천하고 힘들게 살아가도록 버려두실까?’ 그런 생각이 어렴풋이 들긴 했지만 그런 것은 다 ’하느님의 뜻‘이니 사람이 간여할 일이 아니라는 성경 말씀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중학생 수준의 필자의 신관(神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오늘날 수십년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 치고 똑같은 신관을 가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어떤 신자는 ‘권위의 하느님을, 또 어떤 분은 공포의 하느님을, 또 어떤 신자는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으로 알고 믿고 있다. 3위 일체에 대한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는 신자는 몇이나 될까? 사실 신자들 중에는 어떤 분은 야훼를, 어떤 분은 예수를 하느님이라 믿는다. 같은 교회에 나가면서도 어떤 사람은 전통적인 다신교수준인가 하면 신자들 중에는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에 근거한 신자들도 없지 않다.
하느님의 모습뿐만 아니다. 신자들의 기도도 가지각색이다. 어떤 신자는 하느님을 ‘우는 아이가 젖 준다’는 우리 속담처럼 내가 필요한 것을 부지런히 빌기만(祈福)하면 다 들어주신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 있다. 이런 기복적인 혹은 구복적인 신앙을 가지 신자들은 신앙의 대상만 바뀌었지 천지신명에게 빌던 전통 신앙과 전혀 다른 게 없다. 입시철이 되면 수능시험에 ‘내 아들, 딸이 합격하게 해 달라(다른 집 아들딸이야 떨어지든 말든...)고 기도하는 신자가 있는가 하면 자녀들의 취업을 위해 철야기도도 마다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어떤 분(神觀)인가에 따라 종교의 본질에 얼마나 접근했는지의 여부가 결정된다. 도올 김용옥 교수가 요한복음 강의에서 "구약 성경을 믿는 것은 성황당을 믿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말해, 기독교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일이 있다. 나는 이 논쟁에 말려들 수준의 성서학자도 아니거니와 그럴 생각도 없다. 그러나 평신도의 눈에 비친 구약의 하느님과 신약의 하느님은 전혀 다른 분이다. 복수의 하느님. 형식과 권위의 하느님인가 아니면 사랑의 하느님, 자비의 하느님인가에 따라 ‘하느님의 뜻(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이 달라진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만약 토마스 뮌쯔가 승리하고 마르틴 루터가 죽임을 당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오늘날 기독교가 살아남은 이유는 신의 뜻을 저버렸기 때문에 가능한 얘기가 아닐까? 기독교와 자본주의는 코드가 맞을 수 없다. 자본주의가 변질했든지 아니면 기독교가 변질해야 공존이 가능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와 기독교의 공존은 기독교의 변질 즉 정교분리가 아니라 정교공존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밝혔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을... 이러한 명제는 오늘날 부자교회들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이 예수의 정신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을..... (다음은 ‘내가 만난 성직자’로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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