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왜 하지? 학교는 왜 다니지?” 아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면 백이면 백 하나같이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요...”라고 대답한다. “훌륭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라고 다시 물어 보면 대통령, 국회의원 혹은 의사나 판검사, 대학교수...’ 들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어쩌면 이런 사람들 중에 불의와 싸우며 정의의 편에 서서 눈물겨운 싸움을 해 준 덕분에 이 나라가 이 정도의 자유와 민주를 누리고 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이들 대답은 그게 아니다. 아이들은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돈이 많으면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긴 부모들이 그런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고 자기 자녀들에게 귀가 아프도록 말했으니 왜 그런 사람이 훌륭하게 보이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모두 훌륭한 일을 하는 존경받을만한 사람인가? 정말 공부만 잘하면 그런 사람이 되고, 그런 사람이 정말 훌륭한 사람이 맞는가?


나는 청문회에 나온 전직 판검사나 장, 차관 같은 사람치고 존경할 만한 인물을 별로 본 일이 없다. 박근혜정부 들어 청문회에 나온 사람은 더더구나 더 그렇다. 하나같이 위장전입, 병역기피, 부동산 투기, 논문표절, 전관예우...과 같은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이 없었다. 부모나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 국민의 의무인 병역을 기피했다는 것은 범법행위다. 부동산투기를 하거나 제자들의 논문을 표절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범법자도 생계범죄가 아닌 파렴치범에 가깝다. 사회지도층인사의 도덕적 타락은 우리사회를 이렇게 타락하게 하고 병들게 하여 착하게 살면 손해를 본다는 신화를 만들어 놓았다.


범법자를 존경하는 사람도 있을까? 사회적 지위가 높다는 것은 개인의 노력으로 얻은 성취결과여야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부모의 사회, 경제력이 자녀에게 대물림... 등으로 공정하지 못한 경쟁으로 얻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100m 달리기 시합을 하는데 출발선이 다르다는 것은 반칙이다. 반칙이 허용되는 사회는 공정하지 못한 사회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하거나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 약자의 재산을 노리는 사회에서 약자는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열심히 일하면 일한 만큼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가 우리가 꿈꾸는 사회다. 열심히 공부하면 나도 성공할 수 있다는 꿈이 없다면 누가 열심히 일하려고 하겠는가? 청년들이 N포사회니 헬조선이라고 자포자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힘 있는 사람,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경제력이나 학벌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사회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반이성적인 사회다.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지 못하는 사회, 청년들에게 희망을 앗아가는 사회는 나쁜 사회다. 열심히 노력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꿈을 이룰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는 있을까? 어떻게 하면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상식이 통하는 사회, 권력이 주권자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지고 부가 골고를 배분되는 사회, 특권이 아니라 법 앞에 평등한 사회는 불가능한 게 아니다. 정치만 바로하면 기득권 세력이 양심을 회복하면, 재벌이 노동자를 착취만 하지 않으면 정의사회도 경제민주화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희소가치를 배분해야할 권력이 기득권 세력에 특혜를 주거나 선공후사의 정신을 포기한다면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반이성적인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지도자가 타락한 나라에 어떻게 사회정의가 실현되는 민주주의가 가능하겠는가?


<이미지 출처 : NVEN>


무너진 학교에 교육이 가능할까? 공정한 경쟁이 없는 시장에는 강자가 약자를 수탈하는 불공정한 경쟁, 살벌한 힘의 논리만 작용할 뿐이다. 교육도 예외가 아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키우는 일은 뒷전이요, 일류대학, 일등지상주의가 목표가 된 학교에는 교육이 가능하겠는가? 교육은 없고 경쟁만 있는 학교에는 비정상의 정상화, 반교육이 교육이 된다. 교육현장을 가보라. 학교가 사람을 사람답게 키우고 있는가? 상급학교 진학이 교육의 목표가 된 학교에는 문제풀이로 날밤을 세우고 있다. 이런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문제아로 낙인찍고 성적 때문에 자살하는 학생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지 않은가?


훌륭한 사람이 꿈인 학생을 길러내는 학교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가치전도된 사회에서 학생들의 꿈을 실현 할 수 있는가? 경쟁은 있고 교육이 없는 학교에는 학생의 계층상승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교율을 할 수밖에 없다. 참교육은 판검사나 의사, 변호사가 꿈인 학교가 아니라 개성과 소질, 특기를 길러주는 학교여야 한다. 특수목적고, SKY, 그리고 출세라는 코스를 찾아가는 학교가 아니라 보통사람, 평범한 사람을 길러내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 일등지상주의, 일류대학을 부추기는 사회에서 학교가 어떻게 정상적인 교육을 할 수 있겠는가?



함께 합시다

우리헌법읽기국민운동 추진위원이 되어 주십시오. 

https://docs.google.com/forms/d/1EKGFAtCr6Z5z92VrDJHAQlJrUGNSxWuVvnTb4kkEP48/viewform?c=0&w=1


 

[손바닥헌법책 선물하기 운동!!!]

"한 권에 500원 후원으로 최고의 선물을 할 수 있어요!!"

==>>동참하러가기

https://docs.google.com/forms/d/1gPNGF5nC9hFzYQvdY8pNqlTirsr6HVteiOoiIsWEx3Y/viewform?c=0&w=1


 


 ..................................................................



오늘도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학생들을 생각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가족들의 아픔에 함께 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 김용택의 참교육이야기 - 두 번 째 책 '교육의 정상화를 꿈꾸다'를 구매할 수 있는 사이트입니다.


 

'김용택의 참교육이야기-공교육의 정상화를 꿈꾸다'를 구매하실 수 있는 사이트입니다.

 


교보문고 바로가기  , yes24 바로가기  알라딘 바로가기  인터파크 바로가기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교육정책2013.07.28 07:00


“글쎄, 초등학교 일학년 짜리가 틀린 낱말을 고쳐 100점으로 만들어 왔지 뭡니까? 저는 순간 가슴이 철렁해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해 의젓한 학생이 된 모습을 보는 부모들은 지금까지 힘들게 키워온 수고도 잊고 가슴 뿌듯함을 느낀다. 받아쓰기도 늘 100점을 받아 오는 걸 보면 더 없이 대견스럽고 기특하다.

 

 

그런데 어느날 느닷없이 100점짜리 받아쓰기 공책에 뭔가 이상하다고 낌새가 들어 자세히 본 이웃집 학부모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틀린 낱말을 지워 다시 쓰고 점수를 고친 것이다. 100점을 받아 오면 문방구에 가서 친구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을 사준다고 약속한 다음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다시는 아이에게 점수를 강요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마음속으로 다짐했다고 한다.

 

평가란 무엇인가? 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평가란 문제의 난이도에 따라 점수로 표현되는 개념의 조작적 정의다. 자칫 점수라는 수치로 서열을 매기는 마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주객전도의 성적지상주의 문화에 매몰되기 십상이다. 경쟁사회에서 너무나 당연시되고 정당화되는 점수니 등수라는 것은 학습자가 학습한 내용을 가치 내면화했는지의 여부를 수치화한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학교문화는 수치로 나타난 점수가 곧 인격이라는 ‘성적=사람의 가치’라는 등식을 만들어 놓았다.

 

학교에서 평가란 본질을 형식과 뒤바꿔놓는 주객전도가 될 때가 많다. 학생들의 학력평가, 교사의 근무평가, 학교평가... 등등 평가로 시작해 평가로 끝난다. 경쟁사회에서 평가란 어쩔 수 없는 필요악으로 치부해 버리고 타성에 젖어 생활하면 끝일까? 그러나 평가가 개인의 가치는 물론 학급간의 혹은 학교간의 서열을 매기는 척도가 되어 수치로 나타난 실적으로 개인의 명예나 학교의 서열로 이러진다면 이건 좀 얘기가 달라진다.

 

 

‘봉사점수’의 경우를 보자. 공동체 사회에서 서로 돕고 산다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다. 그런데 이 봉사를 점수화해서 일류대학 입학에 당락을 좌우한다면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라는 봉사의 의미는 사라지고 이해관계를 수치화한 결과로 나타난다.

 

학교가 학생들의 봉사를 생활화하기 위해 만든 게 ‘봉사점수제’다. 그런데 방학만 되면 관공서며 시민단체, 심지어 종교단체까지 찾아다니며 점수를 부풀리거나 하지도 않은 봉사 확인서를 받아 오는 등 반교육적인 행위가 반복되고 있다.

 

중학생의 경우 내신 성적 총 300점 중 봉사활동 점수가 18~20점이 반영된다. 고등학생은 봉사점수가 내신성적에 반영되지 않지만 봉사 시간이나 관련 수상 경력 등을 기준으로 수시모집에서 학생을 뽑는 대학이 있어 ‘봉사 점수’를 중요하게 관리하는 학생들이 많다. 이러다 보니 하지도 않은 봉사를 부모들이 대신 받아오게 하거나 2시간 봉사를 하고서는 3시간 혹은 4시간으로 시간 부풀리기를 하는 등 비교육적인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잘못된 정책이라면 개선을 하거나 중단해야 옳지만 교육부의 하는 일은 보면 요지부동이다. 최근 서울시교육청 산하 각 급 학교에는 ‘독서평가제’를 도입, 시행하고 있다. 문용린 교육감이 당선 된 후 3년마다 하던 학교 평가제가 매년 평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학교 경영자를 비롯한 학교 구성원은 당연히 긴장할 수밖에 없다. 학교평가가 교원의 성과급과 연계되기 때문이다.

 

 

독서평가제가 무엇인가? 독서평가제란 학생 1인당 도서대출 건수를 점수로 매겨 학교경영평가와 연계해 학교간 서열을 매기는 제도다. 물론 결과는 교사들의 성과급까지 차등지급하는 근거가 된다. 학교평가 점수를 잘 받으려면 이웃 학교보다 0.1점이라도 더 받아야 하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책을 많이 읽기를 권장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게 원칙대로 잘 될리 없다. 봉사점수제가 봉사는 없고 점수만 남듯 독서평가제도 마찬가지다. 서울시 교육청 산화 각급학교에서는 교사들이 앞장서서 책을 제대로 읽지도 않은 학생들에게 또 다른 책을 대출하라고 독촉하는 일이 다반사로 나타나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에는 42가지에 이르는 수치화한 지표들로 학교의 정상적인 교육을 방해하고 있다. 새로 도입된 독서평가제며 형식적으로 치러지는 수업 공개며 학교별 특색 사업 등 보여주기 사업이 대부분이다. 독서평가제가 주객전도가 되는 이유도 지금까지 학교에서는 독후감을 잘 쓴 학생에게 주던 상이 책을 많이 빌려간 아이들에게 주는 주어지는 상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인성교육을 한다면서 교실에 비디오 하나 틀어주면 실적이 되고, 진로교육도 비디오를 한번 더 틀어주느냐, 여러 번 틀어주느냐는 차이로 실적이 쌓인다. 학교폭력 횟수가 많아지면 학교평가 점수가 낮아지니까, 대부분의 폭력 사건은 학교폭력대책위의 공식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적당히 넘어가고 있다. 학생이든 학교든 수치로 서열을 매기는 실적 쌓기 반교육 문화는 이제 그만 바꿔야 하지 않을까?

 

- 이미지 출처 : 구글 검색에서...

 

김용택의 참교육 이야기 - 10점
김용택 지음/생각비행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인성교육자료2012.09.26 07:04


 

 

이 기사는 광고글이 아닙니다. '굄돌 이경숙님'이 보내 주신  ‘딸들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었다’는 책이 하도 좋아서 아이들을 키우는 어머니라면 꼭 한번 읽어 보기를 권하고 싶은 마음에서 추천하는 글입니다. 2편은 다음 기회가 닿는대로 써 보겠습니다.

 

천사들과 살며 천사들을 닮은 아줌마가 쓰는 사랑이야기...

세상에는 수많은 직업들이 있지만 천사같은 아이들과 함께 살며 배우는 직업만큼 아들다운 직업이 또 있을까? 엄마들의 사랑에 목말라라 하는 아이들에게 엄마에게 다 받지 못한 사랑까지 넘치도록 나눠주는 사람이라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무엇일까? 천사들과 함께 더불어 살면 천사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일까?

 

수필작가로, 다음 블로거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글쓰기 능력까지 인정받은 우수블로거. 지난해는 블로그 대상에까지 올랐던 실력자가 책을 냈다. ‘딸들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었다’라는 굄돌, 이경숙시가 그 주인공이다. ( http://blog.daum.net/2losaria )

 

교육이 무너졌다고 야단들이다. 그런데 모든 교육이 다 무너졌을까? 이땅 어딘가는 이름도 없이 명예고 등지고 아이들이 좋아 아이들에게 혼신의 노력을 다해 정성 사랑하며 가르치며 배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들의 귀중한 땀과 사랑과 정성이 있어 우리 교육은 아직도 버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겨야 산다. 친구고 우정이고 그런 게 뭐 말라죽은 거야? 살아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는 안 돼! 승자만이 실아 남을 수 있고 100점만이 선이야!

 

 

 

참으로 모골이 송연한 경쟁지상주의다. 이런 척박한 세상에 아이들을 사랑하기에 그 사랑의 농도가 남들보다 더욱 짙고 두터워 남들처럼 시장주의 교육을 하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그는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가르쳐 주고 있다. 교사의 혼이 아이들 가슴에 전해지지 않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난 교실에 지우게 가루까지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자상함으로 물고기를 잡아서 먹여주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물고기를 잡는 법을 고집하는 사람... 그 사람이 쓴 교육 이야기를 들고 천고마비의 이 계절에 완행열차를 타고 훌쩍 떠나고 싶은 생각은 나만의 환상일까?

 

이 땅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들은 아프다. 아파도 많이 아프다. 잠도 들깬 아이들을 들쳐 업고 어린이집으로, 유치원으로 던지다시피 맡겨놓고 살기 위해서 동분서주해야 하는 어머니들... 아니 내 아들 딸이 살아가야한 다음 세상에는 이런 비극이 재현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야무진 꿈이 있어 모진 마음으로 모성을 감추고 살아가는 이땅의 어머니들...

 

그런 어머니들을 대신해 상업주의를 너머 사랑을 넘치도록 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이 곧 천사가 아닐까?

 

 

‘자녀에게 지나친 기대가 아이들을 무너뜨린다’, ‘자식키워 봐야 소용없다. 자식망치는 거도 부모다’ ‘엄마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불행한 부모가 불행한 아이를 만든다’, ‘징징거리는 아빠가 싫다는 아이’, ‘ 자식을 망조들게 하는 캥거루 부모’... 목차만 봐도 구미가 당기는 책.... 경쟁시대를 오늘을 사는 부모들이 필독서라는 생각이 드는 책이다.

 

사랑에 눈이 어두우면 폭력도 사랑으로 착각한다. 승자지상주의 경쟁사회에서 객관적으로 아이를 볼 수 없는 청맹과니사랑이 부모들로 하여금 아이들을 벼랑으로 내모는 무서운 세상에 그 보모들을 향해 따가운 목소리를 내는 사람....  

블로거 모임에 갔다가 ‘도대체 빨갱이 실체가 뭐야!’라는 얘기가 화두가 됐고 이 세상에서 빨갱이 소리를 듣고 살아야 하는 글쟁이들에게 어느 블로거는 ‘빨갱이란 휴머니스트다’라고 정의를 내리는 명언에 박수를 보냈던 일이 있다.

 

 

불의를 보고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은 글을 쓸 자격도 정의를 말할 자격도 없다. 그런 사람들이 외치는 진리란 위선이요 가짜 교육자다. 불의를 미워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진정한 스승이요 교육자다.

 

귀에 듣기 좋은 말로 혹은 사랑은 말하고 혹은 칭찬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면 그런 교육으로 아이들은 또 다른 상처를 받고 자라야 한다. 상업주의 가면을 쓴 거짓 교육자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양심적이 교사. 물고기가 아니라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를 주저하지 않는 아름다운 교사가 쓴 ‘딸들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었다’는 책. 이 책한권을 들고 목적지도 없는 완행열차를 타고 떠나고 싶지 않은가?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교사는 그는 누구인가?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을 졸업하여 임용고사에 합격해 발령을 받은 사람을 교사라고 하는가? 교과서나 참고서에 있는 지식을 제자들에게 암기시켜주는 지식전달자인가? 자기가 맡은 제자들을 일류대학에 많이 보내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교사라고 하는가?

 

국민 전체의 평균학력은 높아지는데 교육의 위기는 왜 오는가? '교사는 있어도 스승은 없다'는 언론의 질책을 들으면서 이 시대 교사에 대한 정체성을 확인할 필요를 절감한다. 가치혼란의 시대, 교사에 대한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은 교원들이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학교가 교육의 기능을 감당하기 전, 전통사회에서의 교육은 가정의 몫이었다. 농업사회에서 교육은 삶을 이어가는 능력을 터득케 하는 일이었다. 농사를 짓는 기술을 배우고 조상과 가문에 대한 예의와 제사법을 익히는 것이 교육이었다. 남자는 남자로서 여자는 여자로서 역할을 분담하고 그 역할에 충실하는 것, 사회를 계승하도록 유지시켜주는 기능을 가정교육이 담당해 왔다.

 

모든 사회가 그렇듯이 교육을 비롯한 각 영역별 기능이란 그 사회의 성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회가 농업사회냐, 산업사회냐, 봉건사회냐, 자본주의 사회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산업사회가 시작되면서 전통사회가 담당하던 교육의 기능은 전문기구가 분담하게 된다. 유치원과 학원, 학교 등이 교육을 감당하는 전문기구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산업사회로의 이행이 급속히 진전되면서 가정이 감당해야 하는 기본적인 교육을 가정이 수행하지 못함으로서 여러 가지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가문중심의 유교문화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교육은 계층상승의 수단이요, 부모가 못다 이룬 꿈을 성취시켜주는 한풀이 수단이 되기도 한다. 산업사회로 이행하면서도 교육은 계층상승의 기능으로서의 역할이 달라지지 않는다.

 

산업사회에서 음악학원, 미술학원, 피아노 학원 등은 기능을 습득하는 전문 교육을 담당하는 기구다. 기본적인 인간교육은 가정이나 학교가 감당해야 하지만 우리 사회의 특수성에 비추어 학교가 인간교육을 수행하지 못한다. 대신 학교는 개인의 계층상승을 위한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부담까지 떠맡게 된다. 교육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교사자격증이라는 조건을 갖춰야 한다.

 

물론 교사는 피교육자에게 전문적인 지식도 전수해야지 만 삶을 가르쳐야 한다. 기계적인 기능인을 키우는 것만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이 되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더불어 사는 관계와 사랑과 예의를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은 인성보다 기능이 더욱 높이 평가됨으로서 학교교육은 산업사회의 요구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인성교육이 교육의 본질적인 임무다. 그러나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을 양성하기 위해 '경쟁을 통한 서열 매김' 때문에 그 임무를 이행하기 어렵다. 교육은 지시와 복종이 아닌 사랑과 대화로 이끌어야 한다.

 

사랑과 존경이 없는 지시와 복종, 통제와 단속이라는 수단이 동원되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라 순치다. 교사의 권리만 인정하고 학생의 인권이 무시되는 분위기에서는 진정한 교육이란 불가능하다. 서커스단에서 동물을 순치(馴致)시키는 것과 인간교육이 같을 수 없다.

 

교육의 본질적인 기능을 말하면 '현실론'을 들고 나오는 사람이 있다. 경쟁사회에서 인성보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 살아 남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유능'이 자신의 개인적인 출세나 소득의 차이로 해석한다면 학교에서의 본질적인 교육은 불가능하다. 문제는 경쟁사회에서의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소질이나 특기을 무시하고 획일적인 지식을 주입하고 특정 가치에 의해 줄 세우기를 하는 무모함에 있다.

 

산업사회의 교육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건, 손재주가 있는 사람이건,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이건,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국어, 영어, 수학의 점수가 사람의 가치까지를 서열 매기는 무모함을 고집해 왔다. 1등이라는 가치가 정직이라는 가치보다도 순수라는 가치보다도 인격이라는 가치보다도 더 상위의 가치로 평가돼 왔다.

 

 

자본주의에서는 서열매김이라는 가치를 거의 광적인 원칙으로 고수하고 있다. 제도교육의 틀 안에서 학생이 그렇고 여자나 남자, 교사나 일반 직장인이나 가릴 것 없이 그렇게 서열화에 익숙해 졌다.

 

성적이라는 서열, 일류와 이류라는 학교서열, 연봉이 얼마냐에 따른 소득에 의한 서열, 인물이 얼마나 잘생겼는가에 따른 생김새에 따른 서열, 심지어는 가슴둘레와 허리 사이즈로 사람을 표준화 시켜 서열이나 가치를 매기는 미스 코리아, 미스 월드와 같은 행사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렇게 사회가 만든 원칙도 기준도 없는 서열매김에 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돈이 사람의 가치를 차별화하는 사회에서는 보통사람들이 건강한 이성이나 비판력정신은 오히려 걸거침이 될 뿐이다. 법(실증법)이라는 것, 도덕이라는 것, 교칙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다.

 

교사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표준품'이라는 전형을 만들어 놓고 그런 사람에 가깝도록 만드는 도공(陶工)인가? 머리 모양이나 옷의 모양이 사람의 가치보다 소중할 리 없다. 옛날에는 남자들도 치마를 입었다(두루막, 도포..) 머리모양도 조선시대 500년 동안 남자들이 처녀처럼 길렀다.

 

교문에서 소신을 가지고 가위로 머리를 자르는 사람은 과연 교육자인가? 물론 법이나 교칙을 무시할 수 없다. 이러한 규범은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의무다. 그러나 구성원들의 합의 없는 법이나 규칙은 원인 무효다. 법도 마찬가지다. 소수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법을 악법이라고 한다. 국가 보안법이 그렇다.

 

교사는 공식을 암기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원칙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깨닫게 하는 사람이다. 스스로의 모범을 보이는 사람이다. 교육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다. 입으로는 도덕을 말하면서 부도덕한 일을 하는 교사는 교사가 아니라 지식 전달자이다.

 

오늘날 학교 현장에 교육을 하는 사람보다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교사나 성인이 이중성을 가지고 청소년 앞에 섰을 때 그들은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교사는 몸으로 가르쳐야 한다. 마음으로 가르쳐야 한다. 입으로 가르치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 이미지 출처 : 다음 검색에서...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정치/사는 이야기2012.07.01 06:29


 

 

1. 어떤 일을 당해도 절대로 겉으로 드러내 표현하지 않는다.

2. 남의 부탁이 이라면 무조건 어떤 약속이 있든지 말든지 먼저 들어준다.

3. 아무리 기분이 나빠도 웃으며 그냥 가벼운 말로 넘어간다.

4. 가벼운 말에도 상처를 쉽게 받든다.

 

5. 장난으로 때리는 것은 똑같이 보복을 할 수 있지만 상대방이 화를 내며 때리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6. 만약 타인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을 경우 ‘그냥 해줄걸 그랬냐’는 등의 생각이 들며 마음이 불편해 진다.

 

7. 잘못을 하면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말을 하지 못한다.

8. 거짓말을 하면 티가 난다.

9. 자신의 처지는 생각하지 않고 남의 처지부터 생각하고 행동한다.

10. 칭찬을 들으면 쑥스러워 하지만 상처를 받으면 그 기억이 오래 남는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 보니 어떤 사람이 ‘착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징을 이렇게 정의해 놓았다.

 

이 정의가 착한사람의 특징을 완벽하게 정의해 놓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상당부분 공감이 가는 내용이다.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 가정이나 직장에서 환영받을 수 있을까?

착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착한사람이란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한 사람’이라고 정의해 놓았다.

 

 

 

위의 글은 인터넷에 떠도는 ‘착한 사람’이다. 착하지 않는 세상에 어쩌면 자기표현도 제대로 못하고 무슨 문제가 생기면 혼자서 속으로 꿍꿍 앓는... 우유부단하고 끊고 맺기를 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

 

자기 자녀가 이런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보모들이 있을까?

자기 자녀가 착한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보모들일지라도 막상 이렇게 적어놓고 착한 사람이 가지는 약점을 보면 성큼 내 아이가 착한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내키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내 며느리감으로 혹은 사위감으로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까? 이런 사람이 자신의 신부감으로 혹은 남편감으로 선호하는 사람도 있을까? 이런 착하기만 한 사람을 좋아하는 직장도 있을까?

 

왜 착한 사람이 이상적인 사람이라 할 수 없는가?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유순하라’고... 착하기만 한사람이 사악한 세상에서 지혜롭게 살기 어렵다는 말씀일까? 착한 사람은 좋은 사람이지만 착하기만 한 사람은 바람직한 사람이 아니라는 교훈으로 들린다.

 

 

착한 사람이 좋다면서 왜 착하기만 한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닐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착한 세상이 아니다. 전통사회가 산업사회와 정보화사회로 이행하면서 농촌의 순박한 사회가 이해관계가 얽힌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로 바뀌게 되었다. 지식기반사회에서는 경쟁을 통해 성취감을 맛 보게 되거나 이해관계에 따라 사회적 가치가 차등 분배됨으로서 사람들의 정서도 복잡하게 얽혀지게 된다.

 

이렇게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사회에서 착하기만 한 사람은 본의 아니게 상대방에게 손해는 보게 할 수도 있다. 결국 경쟁사회에서는 무한경쟁을 통한 생존방식을 찾게 되고 이기적인 인간이 승리하는 사회로 바뀌게 되었다. 승자는 능력 있는 사람, 패자는 낙오자가 되는 경쟁사회에서 착한 사람은 상대방의 계산을 파악하지 못하고 이용당하기 십상이다.

 

무학대사가 말씀하셨던가? ‘착한 사람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다 착하게 보인다’고... 악한 사람을 착하게만 보면 착한 사람은 악한 사람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사회나 집단에서는 착하기만 한 사람의 판단 착오로 다수의 선량한 사람들이 피해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착한 사람이 대접받는 사회는 착하기만 한 사람보다 지혜롭기도 하고 착하기도 한 그런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

 

 - 이미지 출처 : 다음 검색에서....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옆집에 사는 00는 벌써 영어학원에 다닌다는데....’

‘00는 피아노를 배운다는데....’

‘00는 미술학원에 다닌다는데....’

 

아이들이 놀고 있으면 불안한 어머니들, 사랑일까? 아니면 욕심일까? 이제 겨우 재롱을 피우며 말을 하기 시작한 서너살짜리 아이를 학원부터 보낼 걱정을 하는 어머니가 있다. 학원에 보내지 않으면 놀 친구가 없으니 학원으로 보내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많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내 아이가 영어에 취미가 있어서 일까? 아니면 아이가 영어를 배우고 싶어 하기 때문일까? 기저귀를 찬 아이에게 영어 공부를 시키는 어머니는 내 아이가 다른 집 아이보다 뒤지면 안 된다는 어머니의 판단 때문이 아닐까?

 

학교에 입학도 하기 전에 영어도 배우고 피아노도 배우고 미술학원에 보내 기능도 익히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입학한 후 학교에서 경쟁에서 뒤떨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껴서일까?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어머니라면 학교에 입학하기 전 영어학원이나 미술학원으로 등 떠밀기 전 아이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초생활 습관부터 지도해야 한다. 자고 일어나면 자기 방을 정리하고, 화장실에 가고, 세수를 하고, 스스로 자기 주변의 정리와 이빨을 닦고... 학원에 보내기보다 평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생활습관을 체화시키는 게 영어나 피아노 학원에 보내는 거 보다 중요하다는 걸 엄마들은 모르고 있을까?

 

 

기초가 부실한 집은 쉬이 무너진다. 건강이 소중하다는 것, 편식을 하지 않는 것, 남의 얘기를 잘 들을 수 있는 자세며, 친구와 친하게 지내는 법, 인내하고 용서하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야 한다. 영어 단어 한두 개 배우는 것보다 지금 가르치지 않으면 평생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리는 생활습관을 체화하도록 가르치는 게 더 소중하지 않을까?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우리나라 학교 교육은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 가르치는 경향이 있다. 구구단을 가르치는데 2×1=2, 2×2=4, 2×3=6... 이렇게 암시시키는 걸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2’라는 것이 무엇을 상징하는 개념인지.. 왜 그런 상징으로 ‘2’라는 모양으로 표시하는지.... ‘사람’이라는 글자는 왜 ‘ㅅ’과 'ㅏ’ 그리고 ‘ㄹ', ’ㅏ', ‘ㅁ'이 합해 만들어졌는지...

 

상징으로 표현되는 언어나 문자는 개념의 조작적 정의다. 개념을 가르치기 전에 주입하는 지식은 시험을 치기 위한 답을 암기하는 것일 뿐이다. 사회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중요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념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과정이 생략된 교육.... 그런 지식의 주입으로 서열을 매기는 것을 교육이라고 해도 좋은가? 점수 몇 점으로 아이의 운명을 바꿔놓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핀란드를 비롯한 유럽의 선진국에서는 아이들이 입학하기 전 절대로 글자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한다. 초등학교 입학한 아이들조차 교실에 붙잡아 답을 암기시키는 게 아니라 자연에 풀어놓고 스스로 의문을 갖게 하고 스스로 답을 찾게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18평 교실에 40여명을 몰아넣고 답을 외워 점수를 내고 서열을 매기는 그런 야만적인 교육을 어떻게 교육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부모들은 왜 경쟁에 매몰되는가? 어차피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체념하기 때문일까?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자녀들이 경쟁에서 이기는 공부보다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옳고 그른 것을 분별도 못하고 시비를 가릴 줄도 모르고 100점만 받으면, 일등만 하면 커서 다 알아서 할 것이라고 착각하는 부모들... 어려서 잘못된 습관은 어른이 된다고 바뀌지 않는다.

 

교육이란 지식을 암기해 시험 친 결과, 그 점수로 서열을 매기는 게 아니다. 교육이란 나를 찾는 과정이요, 옳고 그른 걸 분별할 줄 알게 하는 것이요,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가릴 줄 알게 하는 일이다.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내 부모가, 내 형제와 이웃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게 하는 과정이다. 내가 사는 고장, 나의 조상, 내 민족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를 찾는 과정이다. 사랑과 과욕을 혼동하는 부모는 자신의 욕심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이 기사는 충남인터넷신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http://news.chungnam.net/news/articleView.html?idxno=80867

- 위의 이미지는 다음 검색에서 가져왔습니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교육정책2012.02.09 07:00


                                                      <이미지 출처 : 다음 검색에서>


7차교육과정에서는 교육을 상품이라고 합니다.

상품이란 수요자의 선택권이 인정될 때 공정한 거래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육공급자인 정부나 학교는 어떻습니까?

교재는 공급자인 정부가 만드는 국정도 있고, 출판사가 만드는 검인정도 있지만 수학능력고사가 있어 사실상 국정이나 다를 게 없답니다.
또 교과서 내용도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마음대로 바꾸고....

여기다 교사들에게는 교과서만 열심히 가르쳐 수능점수만 잘 받게 하면 우수교사라 하네요.

교육권을 장악하고 있는 정부, 그리고 SKY 나와야 출세도 하고 사람 대접받는 현실에서 SKY는 독과점 아닌가요?

교육이라는 상품!
독과점 규제법이라도 만들어야 소비자의 권리가 보장되는 게 아닐런지요?  
 



 '홍익인간(홍익인간의 핵심은 '이타주의')의 이념' 아래 '지덕체를 겸비한 조화로운 인간의 양성'(교육법 제1조)

학교가 길러내고자 하는 인간상이다.
오늘날의 학교는 홍익인간이라는 교육목표를 달성하고 있을까? 학교의 교훈이나 급훈을 보면 길러내고자 하는 인간상은 주로 '근면한 사람' '정직한 사람' 또는 '성실한 사람'이다. 학교 교훈이 왜 천편일률적으로 '근면'이나 '정직' 혹은 '성실'일까? 식민지시대 일제가 학교를 세운 것은 조선인민들을 똑똑한 인간을 양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인(황국신민)으로 키우기 위해서였다.

 


해방된지 70년이 가까워 오는데 일본군국주의가 원하는 인간상을 기러내고 있다면 이는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근면이나 정직, 성실은 상대적인 가치개념이다. 여건에 따라 전혀 다른 뜻을 지닌 이데올로기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의식이 없는 노동자, 의무만 있고 권리가 없는 노동자에게 ‘근면이나 성실한 사람이 되라’는 것은 자본이 필요로 하는 인간상이다. 정직, 성실, 근면한 인간은 양성하겠다는 것은 개인이 행복한 사람, 훌륭한 인격자를 양성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자본이 원하는 인간을 양성하고 있다는 증거다.


과정은 생략되고 결과로 승자를 가리는 막가파식 경쟁사회에서 인격이란 무엇인가? 요즈음 TV를 보면 온통 서바이벌 게임투성이다. 승자만이 살아남는 세상... 교육을 비롯해 모든 게 상품이요, 약자는 공존이 아니라 폐기의 대상이 되는 가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왜 시비를 가리고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가치관을 길러주지 않을까?

독재자의 목소리를 암기시키는 교육은 인간성에 대한 폭력이다.

철학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 혹 사리분별을 할 줄 알고 선악을 가릴 수 있는 세계관을 가진 인간을 양성하는 것이 불의한 권력이나 자본이 원하지 않는 인간이기 때문은 아닐까? 교사가 근본적인 회의 없이 지식전달에 그친다면 어떻게 교육자라 할 수 있겠는가?



전교조를 비판하는 사람들 소리를 들어보면 하나같이 ‘왜 전교조는 아이들 가르치는 일보다 정치투쟁이나 하느냐?’는 것이다. 박정희의 영구 집권을 합법화하는 10월유신을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기록한 교과서를 열심히 외우도록 가르치는 교사와 교과서가 틀렸으니 고쳐서 바른 역사의식을 갖도록 가르치자는 교사 중 누구 더 교육자다운가?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기고 노동자는 일이나 하고 교사는 교과서나 열심히 가르쳐라...?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기고 노동자는 노동만하고 농부는 농사나 짓고 장사꾼은 장사나 열심히 하고 선생들은 아이들이나 잘 가르쳐라?’ 맞는 얘길까? 비정규직법을 만들어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의 반밖에 못 받는데... 한미 FTA 통과로 죽도록 농사를 지어도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는데... 부자정책으로 돈가치가 떨어져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는데... 평생 노동자로 살아갈 아이들에게 자본가의 가치관을 갖도록 의식화를 시키는 교육을 열심히 하라?

가만히 있어도 세상은 바뀐다고 한다. 천만에 말씀이다. ‘하늘을 스스로 돕는자를 돕느다’고 했다. 하늘이 가만히 있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바꿔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세상이 바뀔테니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은 지금 당장 죽을 만큼 힘든 사람이 아니라 살만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가족이 아파서 병원에 가지 못하고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아르바이트를 하다 열악한 작업환경 때문에 다치거나 죽어 가는 대학생들에게 그런 말이 통할까?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 맞는 말일까?

열심히 노력만 하면 출세하고 성공할 수 있다고들 한다.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린 말이다. 죽도록 일해도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라면만 먹고 돈을 모으다가 병이 걸려 병원비로 다 날리고 노숙자가 된 사람들에게 그런 말이 통할까? 기본과 원칙부터 세워야 한다. 정치가 바로서지 못하면 경제도 교육도 파탄이다.

교육위기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일수록 교육과정이나 교육내용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현상만 질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육의 중립성이나 교과서문제와 같은 사안에 대해서는 교육인적자원부나 교육학자들의 몫으로 치부해 버리기도 한다.

최근 민주노동당 후원 전교조 교사들에 대한 징계로 교육계가 시끄럽다. 교사도 교사이기 이전에 대한민국국민으로서 국민으로서 기본권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교사는 공무원으로서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팽팽히 맞서고 있다.


교육의 중립성....? 왜 정부는 편향된 의식을 강요하는가?


교육이 상품이 된사회!
교육소비자주권을 살리는 길은 무엇일까?
당연히 상품의 다양성을 보장해 교육소비자에게 선택의 기회를 확대할 수 있도록 주권을 돌려줘야한다.  국정교과서로 혹은 수학능력고사로 교육의 내용은 통제하는 것은 반공 이데올로기로 무장시켜 교육을 장악해 온 과거와 무엇이 다른가? 


교육목표는 혹익인간(이타적인 인간)이면서 이기적인 인간을 길러내는 입시위주의 교육, 그림을 좋아하든, 체육을 좋아하든 무조건 국영수 문제풀이로 사람의 가치가지 서열매기는 학교.  
 
교육소비자에게 선택권이 없는 교육. 내일의 주인공에게 권력이나 기업이나 필요로 하는 가치관을 심어주는게 교육의 중립인가? 마취된 교과서로 병든 가치관을 심어주는 교육은 주권자인 국민을 마취시키겠다는 것은 폭력 아닌가? 
(끝) 

- 이 기사는 '경남민족예술 예술 IN 예술 人(제 4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인성교육자료2010.10.30 15:57



부지런하기만 하면 부자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현재의 상태 보다 좀더 여유 있게 산다는 것은 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나 오늘날의 재벌과 같은 부를 축적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정답이다. 봉건제 사회에서 노예가 아무리 부지런히 일해도 천석꾼이나 만석꾼이 되지 못하는 사유와 같은 이치이다.

완전 경쟁사회에서는 원론이 통할 수 있다. 그러나 주어진 조건이 다른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경우가 대부분이다.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처럼 육지에서 달려야 하는 거북이는 토끼에게 패배하게 되어 있는 게임이다. 재벌의 아들과 날품팔이 아들이 조건이 같지 않은 상황하에서 경쟁하는 경우와 비슷한 것이다.

<'학생들이 마시는스타커피는 한 잔에 5~8000원, 국민들이 하루 소비하는 쌀 가격은 하루 550원에 불과하다'며 분노하는 농민, 국민 1인당 1년에 395잔이나 마신다니... (쌀값이 한 된 160~170원으로, 커피 1잔 3500원)-사진출처 교육희망>

가난한 사람이 재산을 모으려면 어느정도 기반을 가진 사람보다 수십배, 수백배의 노력과 인내와 절약과 저축이 필요하다. 우리 주변에는 부지런한 사람이 가난하게 사는 경우를 가끔 보게 된다. 부지런하기만 하다고 해서 모두가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경제제도나 정부의 경제정책에 따라 부지런 하기만 하다고 다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소의 저축을 한다고 하더라도 물가 상승율이 저축 이자율 보다 높은 경우 재산을 증식 시키기 어려운 것이다. 한 예를 들어 보자.

세금제도는 직접세와 간접세가 있다.
선진국일수록 근로소득세나 재산세와 같은 직접세의 비율이 높다. 그러나 개발도상국에 있어서는 물가라고 하는 상품의 가격에 세금이 계산되어 사업주가 납부하는 세를 간접세라 한다. 간접세의 비율이 높다는 것은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같은 세금을 낸다는 뜻이고, 그것은 곧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으로 나타난다. 빈부격차를 줄이고 경제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조세제도부터 고쳐져야 하지만 그 제도를 고치고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부유한 사람들이라면 그런 법이나 제도가 고쳐지지 않는다.

신문 광고의 경우를 보자.
신문 광고료를 받아 운영하는 신문(대부분의 지방지나 중앙지도 마찬가지이다) 이 광고주의 상품에 문제점이 있다면 그 기사는 줄어 들거나 삭제하는 등의 광고주 눈치를 볼수 밖에 없다.
다시말하면 다수의 소비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언론으로서의 기능은 신문의 생존과 관련되어 공정보도가 어렵다는 뜻이다. 어떤 제약회사의 약품이 인체에 치명적인 해를 주는 성분이 들어있다고 하여 공정보도나 국민 건강쪽에 촛점을 맞추지 못하고 광고주(제약회사)의 눈치를 볼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공해문제, 수질오염이나 공기오염의 주범이 재벌회사들이고 국민건강을 해치는 방부제의 과다 사용등은 심층보도 해야겠지만 그런 언론은 거의 없다.
이제 몇가지 예를 들어 봤지만 "가난은 나랏님도 못 구한다"는 말은 근본적으로 틀린 말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빈부 격차와 건강문제까지도 국가의 정책과 제도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뿐 아니라 거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를 민주주의라고 했을 때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냐?

다수의 백성을 위해 정치를 하느냐, 소수의 힘있는 사람들의 편의되로 정치를 하느냐에 따라 민주주의의 양식이 달라진다. 자유 민주주의냐, 인민민주주의냐, 기독교민주주의냐,사회민주주의냐에 따라 국민의 복지문제를 비롯한 빈부격차 문제가 어떻게 해결 될지가 달려 있다.
자본주의에서 상품이란 구매 욕구를 충동하여 대량 판매로 최대의 이윤을 얻는데 있다.

소득에 비해 소비성향이 높아 절약할 줄 모른다면 저축이 불가능 하듯이 그런 삶의 자세는 후회와 가난을 운명처럼 달고 다니며 살아야 한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부지런하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이 왜 가난한가? 그것은 바로 우리 사회가 원칙만이 통하는 F.M 사회가 아니기 때뭄이다.

원칙밖에 모르는 사람이 바보 취급을 당하고 손해를 보아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은 참으로 소중한 존재이다. 학력이나 성,피부의 색깔이나 생김새와 관계없이 사람으로 태어 났다는것 자체가 소중하다고 믿는 믿음,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이라고 하고 민주주의 사회는 인간의 존엄성을 보편적 가치로 믿고 실천하는 사회이다.

무지하다는 이유 때문에 일방이 희생을 당하거나 손해를 보는 사회라면 좋은 사회라 할 수 없다.
"자신이 소중하다"고 아는 사람은 자신의 권리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바라는 사회는 다수의 희생으로 소수가 절사는 사회보다, 소수의 헌신과 봉사로 다수가 잘사는 사회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