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장 성범죄 윤중천 무죄’...! 법원이 건설업자 윤중천 씨의 강간치상·특수강간 혐의에 대해 가해자 입장에서 판결해 비판이 일고 있다. 재판부는 “윤 씨는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병대 복무를 마친 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로 시작하면서 “윤 씨에게 장벽 너머의 돈이 전부였기 때문에 성 접대를 위해 이용된 여성들을 거래의 대상일 뿐, 허세에 속고 거래 대상이 된 사람들은 그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며 마치 윤중천씨 대변인처럼 변론을 늘어놓았다.
법이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수단’이라더니 이런 판결을 보면 법의 이념이 정의와 합목적성 그리고 법적 안정성이라고 알고 있던 국민들을 허탈감에 빠지게 한다. 입만 열면 ‘법과 원칙’ 운운하면서 현실은 정의가 실종된 판결이며, 재판거래며, 가해자를 두둔하는 어처구니없는 판결을 하고 있다. 윤중천씨 판결뿐만 아니다. 멀쩡한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기도 하고 권력에 저항한다고 수많은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 죽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마르크스·엥겔스는 ‘국가와 법은 그때그때의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을 지배·억압하기 위한 기관·도구에 불과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공동체생활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 진 행위의 준칙을 ‘사회규범’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회규범은 내게 이익이 되는 것은 ‘하게’하고 손해가 되는 것은 ‘하지 못하게 하는’ 당위의 법칙이며 보편성, 다양성, 상대성을 갖는다. 관습이며 도덕, 종교규범, 법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규범이 서로 충돌할 때 대 기준이 되는 규범을 우리는 헌법이라고 한다. 헌법이란 ‘국가 기관의 조직 및 작용에 대한 기본적 원칙과 국민의 기본적 권리·의무 등을 규정한 근본법. 한 나라의 법체계 가운데 최고의 단계에 위치하는 법’이다.
사회구성원 중에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순진한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사회 특히 자본주의에 살기 위해서는 사회규범을 모르고 산다는 것은 불이익을 당하기 쉽다. 특히 전통사회처럼 노력한 만큼의 대가가 주어지는 순수한 사회가 아니라 정치가 개인의 이해관계를 조정해 희소가치를 배분하는 사회에서는 규범의 규범인 헌법을 모르고 산다는 것은 불이익을 감수하며 살아야 한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권리는 무엇인지, 내가 지키지 않으면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의무는 어떤 것인지 우리사회가 어떤 가치를 지행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국민으로서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교통법규를 모르는 사람이 운전대를 잡으며 좌충우돌 자신뿐 아니라 상대방의 목숨도 위험하게 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운전대를 잡을 사람이 모든 국민을 위해 일하지 않고 자신을 믿고 지지해 준 유권자가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남용한다면 그 피해는 본인뿐만 아니라 다수의 국민들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권리를 잘못행사하면 권리가 아니라 폭력이다. 폭력을 당할 가해자에게 자신의 권리를 맞길 바보가 있을까? 그런데 왜 학교에서는 헌법을 가르치지 않을까?
지금도 학교 입구 교훈 석에는 ‘성실, 근면, 검소’와 ‘근면, 협동, 창의’...와 같은 교훈이 가장 많이 눈에 뜨인다. 학생들에게 주는 상장에도 ‘성실하고 품행이 단정하여...’ 상장을 준다는 문구를 많이 쓴다. 인성교육으로 ‘성실, 근면, 검소’ 참 좋은 덕목이다. 그런데 우리 헌법에는 어떤 인간을 길러내기를 바랄까?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헌법 전문에는 ‘3·1운동으로 건립..’되고 ‘4·19민주이념을 계승..’해 대한민국이 ‘정의와 인도...’의 바탕 위에 설립된 나라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학교교훈에서 볼 수 있듯이 착하기만 한 학생 근면하거나 검소가 개인적 가치를 우선적인 가치로 가르치고 그런 인간을 길러내는데 힘을 쏟고 있다. 개인적인 인간, 순종을 강조하면 정의로운 인간을 길러낼 수 있는가?
돌이켜 보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멀리는 동학혁명에서 3·1혁명 그리고 4·19와 광주항쟁, 6월 항쟁. 촛불혁명으로 오늘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러한 정신의 근본은 불의에 저항하는 정신 곧 ‘정의’다. 우리민족의 강인한 정의감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가능했겠는가? 불의에 죽음으로 맞서는 정신, 옳고 그름, 정의와 부당함, 평등과 불평등, 개인의 권리와 공동선‘’‘에 대한 기준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오늘 날이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그런데 와 학교는 순종을 가르치면서 정의는 가르치지 않는가?
‘착하기만 한 학생’, ‘가만 있으라’는 순종을 가르치는 학교일수록 불의에 저항하는 정신 정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순수한 사회라면 착하기만 한 사람이 대접받고 살 수 있지만 눈뜨고 코 베어 가는 세상에는 착하기만 한 사람은 바보 취급받는다. 평생 노동자로 살아갈 제자들에게 헌법에 보장된 행복추구권도 노동법도 근로기준법도 가르치지 않는다. 노동자로서 성실, 근면, 검소하게만 살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순종보다 정의를 가르치는 학교에서 민정한 민주시민을 길러낼 수 있지 않을까?
......................................................................
'정치 > 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0년 나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 (16) | 2019.12.31 |
---|---|
당신의 먹거리는 안녕하십니까? (11) | 2019.12.12 |
당신은 행복할 권리가 있어요 (18) | 2019.12.05 |
모든 민주주의는 다 좋은가? (12) | 2019.12.03 |
나는 자본주의가 싫다 (8) | 2019.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