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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나가보면 목회자들이 가장 강조하는 게 기도다. 그런데 참 이해 못할 일이 있다. 성서를 보면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라고 했는데 왜 자꾸 기도를 하라는 걸까? 다른 성경을 보면 이런 구절도 나온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 11:9-13) 마가복음서에는 하나님이 다 아시는데, 구하기 전에 다 채워준다고 했는데 누가 복음서에는 구해야 주신다고 했다.
기도란 무엇인가? 목회자들은 기도를 많이 할 것을 주문하고 있지만 기도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바르게 가르쳐 주지 못하고 있다. 사전을 보면 기도(祈禱)란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어떤 절대적 존재에게 빎. 또는 그런 의식’이라고 정의해 놓고 있다. 기독자라면 기도를 할 줄 알아야한다. 그렇다면 신에게 무엇을 빌 것인가? ‘내가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고 앉아서 하루 종일 앉아 빌어도 밥을 차려다 줄 그런 신은 없다. 우리남편이 출세하고 내 아들이 유명대학에 합격하고.. 이런 기도를 들어 줄 신도 없다.
기독교나 불교의 교의는 샤머니즘에서 하는 ‘가정의 평안이나 개인의 부귀영화를 주문’하는 것을 기도라 하지 않는다. 불교에서 기도라면 해탈을 위한 자기희생이요, 중생을 위한 보시라고 이해할 수 있다. 기독교라고 별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기도는 구복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자기 헌신이며 구체적인 봉사의 실천이 아닐까? 예수가 자신을 제물로 내놓아 속죄의 제물이 된 것처럼 말이다. 내 아들이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라면 이웃의 아들은 낙방해도 좋다는 건 기도가 아니라 주문(呪文)이다.
내 아들이 합격하면 누군가 떨어져야 하고 내가 돈을 벌면 누군가는 손해를 봐야 하는 상대론적 시각이 없이 ‘내게 이익만 된다면...’ ‘무조건 복을 주십시오’라는 기도란 주문에 가깝다. 지도자의 책임이 크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게다. 나와 가정의 행복을 비는 것이 기도라고 아는 신자들이 사는 공동체는 진정한 신앙공동체가 아니다. 나의 희생으로 상대방에게 행복을 주겠다는 끝없는 사랑을 실천하는 기독교나 보시를 실천해 중생구제를 하겠다는 부처의 마음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나의 이익이나 추구하는 좀스런 기도를 하고 있다면 그런 기도를 들어줄 신이 있을까?
1987년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당하다 비명에 갔다. 젊은이를 끌어다 수배된 친구의 행적을 대라며 온갖고문을 하다 죽자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해 온국민이 분노했을 때다. 60항쟁의 발단이 되기도 했던 당시 감리교의 한 속회모임에서 필자는 이렇게 기도했다.
박종철의 죽음에 부쳐
주여 !
우리는 방관자들입니다.
21살의 꽃다운 젊음을 죽인 공모자들입니다.
그가 욕조에서 숨막혀 할 때
우리의 손들이 그의 목을 졸랐고
우리 눈들이 외면하고 우리 입들이 조소하였나이다.
그렇게도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고
정의를 외치던 작은 예수가
주님의 가신 길을 십자가를 지고 따라갔습니다.
주님 !
몇 명의 이삭이 더 있어야 이 땅이 하늘나라가 되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젊음이 피를 흘리고 질식하고, 피멍이 들어야
우리의 소원이 성취되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박종철 열사와 역사 앞에
더 이상의 방관자가 될 수 없습니다.
침묵의 미덕을 운운할 면목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만 가슴을 치고 통회할 위선을 벗어야겠습니다.
불의의 들러리가 될 수 없습니다.
위선으로 화장하고 위선자의 가면을 쓰고 있을 면목이 없습니다.
주여 !
우린 이제 밥값을 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나이 값을 해야 할 때도 됐습니다.
피 값을 외면할 면목이 없습니다.
박종철 열사의 아픔이, 그 가족의 가슴에 맺힌 한을
우리들에게 나누어주십시오.
아 ! 그는 갔습니다. 우리의 불의를 꾸짖기 위해 갔습니다.
찬란한 승리자가 되어 고통도 죽음도 불의도 이기고
삼천리 방방곡곡에 부활의 씨앗이 되기 위하여 갔습니다.
주님 !
이제 그의 영혼을 쉬게 하시고
그가 못 다한 일들을 감당하는 도구로 저희들을 써 주십시오.
이 땅의 온갖 불의와 거짓과 위선의 껍질을 벗게 해주시고
이일을 계기로 주님의 살아 계심을 확인하게 해주십시오.
살아 있음이 그의 죽음을 욕되지 않게 해 주소서 !
예수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아 멘-
생선장수에게는 생선냄새가 나야 하듯 예수를 믿으면 예수냄새가 나야 한다. 날아갈듯한 옷을 입고 성당에 앉아 짜여진 형식에 맞춰 가슴을 치고 울부짖는 것만이 기도가 아니다. 최루탄 냄새가 천지를 진동하고 죄없는 젊은이가 고문으로 혹은 녹화사업으로 죽어 가고 있을 때 가장 확실한 기도는 불의한 자들을 향해 돌을 던지는 일이다. 총을 들고 무고한 시민을 학살하고 있는데 성당에서 거룩하게 ‘내탓이오, 내탓이오‘하고 가슴을 치는게 어떻게 기도라고 할 수 있는가? 나의 기도가 이루어진 셈일까? 필자는 이 기도 후 구속수배를 당하면서 해직의 길을 걸어야 했다.
신은 어떤 존재일 때 찬미의 대상이 되는가? 십자가의 길이나 외우고 묵주기도 몇 단을 바치면 하느님이 기뻐하실까? 울부짖고 매달리는 사람에게 더 많은 축복을 주는 신은 찬미의 와 존경의 대상이 아니다.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이미 구하기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있어야 옳다. 신앙은 신자의 신앙수준에 따라 신의 수준도 달라진다. 이름은 같은 하는님이지만 신자들은 각각 다른 신을 섬긴다면 이는 목자의 책임이다. 어떤 이는 구복 신을, 어떤 이는 공포의 신을, 어떤 이는 사랑의 신을, 어떤 이는 자비의 신을 섬기면서 같은 천국에 가기를 바랄 수 있을까? 어떤 신을 섬기든, 기도는 주문(呪文)이 아니고 사랑의 실천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은 스스로 돕는 이를 돕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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