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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즈에 비췬 세상

용이 날고, 가릉빈가가 노래하는 영암사지를 만나다

by 참교육 2012.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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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산재 등반에 지친 몸을 이끌고 하산하는 등산객 앞에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공터가 나타

났다. 어느 유명산을 가도 만나는 절.. 그런 절터려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잔디밭을 걸어오다 영암사지를 만난다. 태산준령 모산재를 뒤로하고 섰었던 화려한 절... 그 웅장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절을 짓기 위해 쌓았던 주춧돌과 깨진 기왓장들과 몇몇 유적들만 남아 팸투어객들을 안타깝게 했다.

 

영암사지를 둘러 본 사람이라면 몇 번이고 놀란다. 첫째 그 웅장했던 절터에 놀라고 둘째 남아 있는 석탑과 금당 그리고 거북받침대의 섬세함과 돌 하나하나에 새겨진 선조들의 예술적 감각에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영암사지는 황매산 남쪽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사적 제 131호)에 있는 절터다. 1984년 발굴조사에서 불상을 모셨던 금당과 사금당, 회랑과 부속터 건물들이 남아 있다.

 

거대한 석축위의 금당터 기단에는 구름위로 용이 날고, 천상의 새 가릉빈가가 노래하고, 사자가 웅크리고 있다. 추측컨데 이 절터에는 화려하고 장엄한 건물이 서있었을 것을 짐작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불국사, 미륵사, 황룡사와 같은 대찰에서나 볼 수 있는 회랑도 있어 영암사가 얼마나 큰 절이었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렇게 크고 웅장한 절이 언제 무슨 까닭으로 사라져버렸는지 현재로서는 남아 있는 기록이 없어 알 길이 없다. 영암사지의 번성과 멸망이 안개 속에 묻혀있어 우리 일행을 더욱 안타깝게 한다. 영암사지에 대한 유일한 기록은 서울대학교 도서관 탁본첩에 있는 적연국사자광지탑비명(寂然國師慈光之塔碑銘) 정도다. 고려 현종 14년(1023)년에 세웠다는 비석조차 지금 사라지고 주인을 잃은 거북 받침대만 외롭게 지키고 있다.

 

사실은 정확하게 이름조차 고증할 수 없는 절이다. 구전으로 전해져 온 이름이 ‘영암사’요, 영암사지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 말부터 고려시대에 걸치는 각종 기와와 8세기경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되어 그 연대를 짐작할 뿐이다.

 

발굴을 통해 조사한 결과 현재는 불상을 모셨던 금당, 회랑터와 여러 건물터가 있다. 절터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쌍사자석등(보물제 353호), 삼층석탑, 귀부, 당시의 건물 받침돌, 그리고 각종 기와조각들이 남아 있다.

 

 

 

 

 

금당지에는 기단 정면 구름 위를 나는 용이 투각된 계단 소맷돌과 기단 좌우측 사람의 머리에 새의 몸을 가지고 한없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하늘을 난다는 가릉빈가가 새겨진 계단 소맷돌은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걸작이다. 금당 한가운데 불상이 자리했던 지대석에는 팔부중상이 새겨져 있는데 뒤편 일부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보물 제353로 지정된 쌍사자석등은 영암사의 핵이며 꽃이다. 쌍사자석등은 팔각을 기본으로 한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등양식에서 간주석만을 두 마리 사자로 환치시킨 형태이다. 아래받침돌에는 복련으로 연꽃모양이 조각되었고 그 위로 사자 두 마리가 가슴을 맞대고 서 있다.

 

                                                  <이미지 출처 : 다음 검색에서>

 

영암사지의 석축은 대단한 볼거리다. 금당터 앞의 긴 축대와 절터로 들어 갈 때 가장 먼저 만나는 중문터에는 석축과 삼층석탑을 볼 수 있다. 보물 제480호 지정된 통일신라시대 보물로 지정된 높이 3.8m의 3층석탑은 황매산에서 나온 화강암으로 만들었다는 탑의 색깔 때문인지 엷은 살색을 띠어 온기가 느껴진다.

 

금당터 옆 40m 서쪽에 있는 건물터로 지대석과 하대석만 남은 석등을 앞에 두고 전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지와 측면에 2구의 귀부가 위치하고 있다. 둘 다 고려시대의 것으로 그 중 하나는 창건주이고 다른 것은 적연선사부도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로 짝을 맞추려고 했는지 동쪽 귀부는 서쪽 귀부에 비해 얌전하고 정적이지만 새겨진 무늬가 뛰어나다.

 

 

 

 

 

 

등줄기가 반듯이 선 등에 육각 귀갑문이 선명하고 특히 비신받침에 새겨진 물고기문양(魚紋)은 귀한 것이다. 좌측의 어문은 입을 벌린 물고기가 가운데 연꽃을 다투는 문양이고 우측의 것은 물고기가 서로 꼬리를 쫓는 형상을 되어 있다. 이 두 귀부는 함께 보물 제4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어줍잖은 답사지식으로 보더라도 선조들의 신앙심이 얼마나 깊었는지, 또 정복적인 자연관이 아닌 자연친화적이고  뛰어난 예술감각과 석조기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돌을 가지고 어떻게 이런 생동감이 넘치는 예술적인 감각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었는지... 

 

모산재의 산새와 기암괴석에 등산의 즐거움을 맘껏누린 등산객에게 영암사지는 또 다른 합천의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이런 선조들의 기한 문화유산을 지켜내지 못하고 ㅅ라지게 한 후손들의 부끄러움에 고개가 숙여진다.

 

며칠만 더 늦게 왔더라면 황매산 자락에서나 볼 수 있는 화려한 단풍에 어우러진 영암사지를 볼 수 있었을 것을... 아쉬움을 남기도 우리 일행은 황매산 억새를 만나러 발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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