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4. 16 참사 2년 전인 2014년 4월23일 '제주도 수학여행, 관광인가 수학(修學)인가?'라는 주제로 글을 썼던 일이 있다. 그 후 2년 뒤인 2014년 4월 16일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4. 16 참사를 겪었다. 다시 한번 묻고 싶다. 이런 위험을 부담해 가며 그래도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고 싶은지, 그것이 정말 교육이기나 한 것인지를.... 





새학기를 맞기 빠쁘게 제주로 혹은 관광지로 수학여행 계획을 세워 떠나는 학교가 있다. 이름이 수학이니까, 아이들이 공부를하러 간다니까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제주에 관광철을 맞아 집단으로 떠나 사진찍고 향락문화, 소비문화를 배우고 돌아오는 게 수학인가? 수학여행을 다녀 온 학생들에 물어보자. 머리 속에 남는게 무엇인지...


학교에서 일어나는 교육적이지 못한 일이 어디 한두가지일까만은 수학이 아닌 관광을 왜 계속 고집하고 있을까? 사전을 찾아보니 수학여행이란 '교육 활동의 하나로서 교사의 인솔 아래 실시하는 여행. 학생들이 평상시에 대하지 못한 곳에서, 자연 및 문화를 실지로 보고 들으며 지식을 넓히는 행사'라고 정의해 놓았다. 


이런 여행이 목적을 달성하고 있을까? 수학여행을 보내는 학교도 그렇지만 부모들이 동의하는 이유는 '공부하느라고 고생하는 아이들에게 3년에 한번뿐인 여행을 보내는게 나쁠게 있는가'라는  정서가 이런 비교육적인 행사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경험도 경험 나름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학여행에서 아이들이 숙박업계나 여행사의 장사속으로 아이들이 상처받고 피해는 보는 일을 수없이 경험했다. 


백번 양보해 수학여행을 통해 그런 고생도 한 번 해 보는게 필요하다고 치자. 그렇지만 한 학년 수백명이 관광버스에 나눠타고 숙박시설에 짐짝처럼 취급당하며 소비문화와 향락문화를 배우는게 정말 교육일까? 학생들이 스스로 조별토론을 통해 소그룹별로 나누어 농촌체험이나 봉사활동을 하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숙박시설이나 편의시설 부족으로 애로사항을 모르는 바 아니다. 


숙박시설이나 편의시설의 애로사항을 핑개로 수학이 아닌 향락문화나 소비문화를 수학하는 비교육적인 연례행사를 계속한다는 게 교육적인가? 교육은 학교에서만 하는게 아니다. 지자체는 이런 문제가 어제 오늘의 문제도 아닌데 왜 해결책을 찾지 않고 있는가? 숙박시설이 없다고 대안이 없는게 아니다. 몇년 전 경남창원의 한 고등학교 학생들은 시장에 수학여행을 가서 화제를 됐던 일이 있다. 역사가 숨어 있는 시장을 둘러보면서 고향을 배우고 나를 찾아가는 체험...얼마나 멋진 교육인가? 


다시 4. 16을 맞으며 우리는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반교육적인 문화를 하루 빨리 청산하기를 기대해 본다. 학교운영위원회가 존재하는 이유도 그렇다. 아이들은 학교공부에 지쳐 학교를 떠나 며칠간 머리를 식히며 쉬고 싶지만 교육적이지 못한 향락문화를 체험시키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학교운영위원회는 이러한 반문화를 개성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다시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눈물을 흘리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 안전교육과 함께 소비문화와 항락문화를 체험하는 수학여항문화를 하루 빨리 개선하기를 기대해 본다. 단원고 학생 250명 인솔교사 12명, 그리고 승객 33명 등 304명이 희생된 참혹한 일을 반복하지 않도록 교육당국과 학교는 교육하는 학교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학교가 할 본연의 의무가 아닌가? 

    



제주도 수학여행, 관광인가 수학(修學)인가

 

2012년 4월 23일 


새 학기가 되기 바쁘게 학교마다 수학여행계획에 분주하다.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는지 학교마다 제주도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지로 선택하는 이유가 뭘까? 언젠가 제주도에 수학여행을 다녀온 학생에게 물었다.

 

“제주도 여행가서 뭘 배웠니?, 어떤 곳이 특별히 인상적이었니?”

“제주의 쪽빛바다와 올렛길, 정방폭포며 한라산의....!”

“그런 건 영상으로 봐도 다 있는데...! 왜 하필 돈 들여 아까운 시간 내 고생하면서 그기까지 가서 봐야하지?”

“그건...??? ”

 

제주에 다녀 온 학생이라면 당연히 4·3에 대한 얘기부터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관광객의 구경거리식의 여행이라니.....!

“혹시 제주도 여행 중에 4·3에 대해 들어 본 얘기라도 있느냐?”고 했더니

“4·3이 뭐예요?”하고 되물었다. 

 

(가) 학교에서 배우고 익히며 학습한 내용을 현장학습을 통하여 확인하고 감상하는 산교육 경험을 갖는다.

(나) 사진과 지도로만 보던 아름다운 국토의 자연과 나날이 발전하는 국토의 참모습을 통하여 국토애를 갖는다.

(다) 조상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돌아보면서 우리의 긍지를 높이고 다른 고장들의 지리 풍속 등을 살피어 배움의 폭을 넓힌다.

(라) 질서를 지키고 인화 협동하는 공동생활을 통하여 상호간의 우정을 돈독히 하는 실제의 체험을 갖는다.

(마) 올바른 여행 자세와 방법을 익혀 문화시민으로서의 자질을 함양한다.

(바) 학창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을 마련하고 내일의 보람을 위해 희망적인 꿈을 키운다.

  

어떤 학교에서 계획한 수학여행 목적이다. 이 정도의 목적을 달성하는 수학여행이라면 교실에서 배우는 것 보다 백배 천배 낫다. 그런데 왜 제주도에 다녀와서 4·3도 모르고 돌아왔을까? ‘4·3제주항쟁’이 무엇인가?

 

제주도민의 3분의 일 혹은 3만명이 미군과 국군, 경찰의 총에 억울하게 숨져간 비극의 땅. 현기영의 ‘순이 삼촌’이나 이산하의 ‘한라산’이라는 시한편이라도 읽어보고 다녀 온 수학여행이라면 남다른 수학(修學)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역사의 아픔을 외면하고 제주도를 관광여행하고 다녀오는 수학여행, 과연 수학(修學)이라 할 수 있을까?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하려면 학교운영위원회에 여행의 목적이나 일정, 경비 그리고 사전답사계획까지 구체적인 계획서를 제출해 통과시켜야 한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사는 시행착오가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다. 그런데 소풍이며 수학여행이 연례행사처럼 반복되다 보면 목적 따로 행사 따로다. 시행 후 결과평가는 더더욱 없다.

 

소풍이나 수학여행만 이런 게 아니다. 계기수업은 또 어떤가? 학교에서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계기 수업은 없다. 일제식민지 잔재인 애국조례 때 교장이 몇마디 하는 게 계기교육(契機敎育)의 전부다. 수업시간이나 조·종례 시간에 전교조교사들이 몇마디 하면 신경을 곤두세운다.

 




수업시간에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3·1절이나 4·19, 혹은 5·16이나 5·18에 대해 물어보면 몰라도 너무 모른다. 학생들 잘못이 아니다. 시험 점수 몇 점으로 인생의 승패를 좌우하는 현실에서 그런 게 대술리 없다. 어떤 단체에서 통일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더니 "초·중·고생 40%는 통일 안 돼도 그만이라고 응답했다고 한다. 통일을 하면 북한이 가난하기 때문에 우리가 손해를 보기 때문이란다.

 

오늘의 내가 여기 살아 있다는 것은 우연일까?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 내가 먹고 입고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선조들의 피와 땀의 결실이요, 노동과 투쟁의 댓가다. 역사의식이란 조상들에 대한 부채의식이요, 예의다. 살아 있음에 대한 감사함을 모르는 학생들에게 학문이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역사의식, 민주의식, 시민의식, 권리의식이 없는 인간을 양성하는 게 어떻게 민주시민교육인가? 교육을 받아도 나를 찾지 못하는 방랑자를 만드는 교육, 교육의 목적이 출세하고 재산을 늘리고 유명인사가 되기 위해서라면 그런 교육으로 어떻게 사람다운 사람을 길러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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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학생들을 생각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가족들의 아픔에 함께 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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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교육정책2012.01.23 06:57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여성들이 원하는 신랑감 조건의 평균은 '연 소득 4348만원, 자산 1억9193만원, 키 177.51cm'. 신부감 조건의 평균은 '연 소득 3161만원, 자산 1억7193만원, 키 163.63cm'.

결혼정보회사 듀오가 '대한민국 2030 미혼남녀 결혼 인식‘에 관한 연구조사 보고서에 나오는 자료다.

사람 됨됨이나 인격이 아니라 소득이나 키가 신랑, 신부감의 선택조건이라니 씁쓰레 하다. 조건이 붙은 사랑은 가짜라던데... 저런 조건이 충족되면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을까? 텔레비전의 영향 때문일까? 얼짱, 몸짱문화가 젊은이들의 우상이 된 지 오래다. 학교가 길러내겠다는 이상적인 인간상은 어떤 모습일까?

                                                          <이미지 출처 : 다음 검새에서>

우리나라 교육기본법 제 2조는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고... 인류공영의 이상 실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학교는 분명히 얼짱이나 몸짱이 존경받는 사람이 아니라 민주시민으로서 자질을 갖춘 자주적인 인간,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하는 ‘홍익인간’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보고 있다.

학교가 정말 이타적인 인간, 홍익인간을 길러내고 있을까? 천만에 말씀이다. 오늘날 출세(?)를 했다는 사람, 사회지도층 인사들을 보면 분명히 학교가 길러내겠다는 인간상은 아니다. 아니 이타적인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게 선이요. 승자지상주의 가치관의 인간’, 이기적인 인간을 길러내고 있다고 보아야 옳지 않을까?

향락과 퇴폐적인 문화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이전의 인간적이고 순수성이 남아 있던 시대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이상적인 인간으로 생각했을까? 우리조상들이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여겼던 사람은 몸짱이나 얼짱도 아니요, 반드시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도 아니었다. 옛사람들의 이상적인 인간상은 ‘신언서판(身言書判)’ 네 가지 조건을 갖춘 인간이었다. 신수(身)와 말씨(言), 문필(書)과 판단력(判)을 기준으로 사람 됨됨이를 구별했다.


신(身)이란 사람의 풍채와 용모를 뜻하는 말이다. 신은 사람을 처음 대했을 때 첫째 평가기준이 되는 것으로, 아무리 신분이 높고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라도 몸가짐이 바르지 못한 사람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말이다. 오늘날처럼 소신 없이 내게 이익이 되는 일이면 신의도 헌신짝처럼 버리고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둘째, 언(言)이란 사람의 언변을 이르는 말이다. 이 역시 사람을 처음 대했을 때 아무리 뜻이 깊고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도 말에 조리가 없고, 말이 분명하지 못했을 경우,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셋째, 서(書)는 글씨(필적)를 가리키는 말이다. 예로부터 글씨는 그 사람의 됨됨이를 말해 주는 것이라 하여 매우 중요시하였다. 그래서 인물을 평가하는데, 글씨는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글씨에 능하지 못한 사람은 그만큼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넷째, 판(判)이란 사람의 문리(文理), 곧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아는 판단력을 뜻하는 말이다. 사람이 아무리 체모(體貌)가 뛰어나고, 말을 잘하고, 글씨에 능해도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아는 능력이 없으면, 그 인물됨이 출중할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성현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은 표현의 차이는 없었을지 몰라도 궁극적인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자는 '군자'를 가장 인상적인 사람을 군자라고 보았다. 군자란 ‘학문적으로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걸어야할 길을 찾는 사람, 도덕적으로는 원만한 인격을 이룬 사람’을 말한다. 군자는 자기의 입장보다는 남의 입장을 먼저 고려할 줄 알고, 자기의 심성 계발과 인격도야에 부단히 노력하고 인덕(仁德)을 갖추고  도(道)를 품어 행하여 사회에 기여하는 자세를 지닌 사람을 말한다.

기독교의 이상적 인간상도 그렇다.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고 타인의 구원을 위해 희생과 봉사를 할 수 있는 헌신적인 인간이 이상적인 인간으로 보았다. 불교의 이상적 인간은 진리를 깨달아 붓다처럼, 사법인(四法印)과 사정제(四聖諦)를 통해 진리를 깨달아 지혜와 자비를 누리는 사람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보았다. 비록 표현을 달랐지만 오늘날처럼 얼짱, 몸짱도 아니요 돈이나 사회적 지위가 사람됨됨이의 기준이 되지는 않았다. 


자신의 생각은 없고 남의 생각으로 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돈많은 사람, 잘생긴 사람,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이상적인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회. 얼짱이나 몸짱처럼 외모로 사람 됨됨이를 판단하는 사고방식은 건강한 사람의 생각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자식이 신의도 분별력도 없는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인간이 되기를 원하는 부모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신념도 철학도 헌신짝처럼 팽개치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고 존경받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학교는 어떤 인간을 길러내고 있는가?  자주적인 생활능력을 갖춘 사람? 민주시민으로서 자질을 갖춘 합리적인 사람?  민주의식과 역사의식을 갖춘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시민? 불의를 보고 분노할 줄 아는 정의롭고 용기 있는시민.....을 길러내고 있는가? 


새해 아침에 생각해 보는 이상적인 인간상이 공허해 보이는 이유는 그런 사회가 요원하기 때문만 일까? 윤동주님의 서시가 생각나는 새해 아침에.....

민족의 대명절 설날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소원하시는 일 모두 이루십시오.
새해에는 여러분의 가정에 화평과 사랑이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인성교육자료2010.11.29 15:14



-성경을 처음 만난 충격-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던 일이지만 필자가 성경을 처음 읽으면서 받은 충격(?)은 '경이로움' 바로 그것이었다. '책에 씌어진 모든 것은 진실'이라고 믿고 있었던 중학교시절, 신학이니 그런 게 있다는 것도 모르고 개신교 장로교회의 고려신학파 목사님이 가르쳐 준 성경은 나의 삶의 모든 것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나에게는 '죽음'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는 열쇠로 받아 들였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죽은 후에 그 무시무시한 지옥에 갈 수도 있는데 왜 하느님을 믿고 천당에 가려하지 않느냐? '무서운 하느님, 공포의 하느님. 이게 내가 처음 만난 하느님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걸 믿지 않을까?' 그런 생각과 함께 독학을 하던 나는 하루종일 일에 지친 몸으로 새벽기도와 아르바이트, 그리고 야간 공부를 계속했다. 순진하기도 하고 단순할 수밖에 없었는 청소년기의 나는 '성서가 나의 삶의 모든 것'이었고 '성서대로 사는 것'이 나의 전부였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나이가 들면서 험한 일, 억울한 일도 만나면서 '이게 아닌데...' 하는 회의에 빠지기 시작했다. '세상은 혼자서 사는 게 아닌데... 나만 행복할 수 있는가? 나의 행복을 위해 누군가는 어려움과 힘든 일도 만나야한다는 것,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나로 인해 상처를 받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기주의는 나쁘고 개인주의는 좋은 것'이라는 논리는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라는 것을 이해 하면서 뭔가 잘못된 이론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깨닫게 된 것이다.

-종교의 이데올로기성-

착하게 사는 사람이 고통을 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으로 덮어버리기에는 이해가 안 되는 일도 보게 된 것이다. 전두환이 광주항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대통령이 됐을 때 '권력은 위로부터 나지 않은 게 없다'면서 목사님들이 그를 위해 조찬 기도회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몸서리를 쳤다. 종교가 본질적인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종교가 권력과 결탁할 수 있다는 사실과 종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을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훨씬 뒤에나 알았다. 또한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이 왜 독재권력 사회에서 뿌리내릴 수 없는 가를 알지 않고 믿는 종교는 맹신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1995년 현재 한국사회에서 종교를 갖고 있는 인구의 비율은 무려 50.72%나 된다고 한다. 한국인 2명중 1명은 어떤 신이든지 간에 믿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인구중 45.67%는 불교를 믿고 있다. 개신교와 천주교 신도의 비율은 각각 38.77%와 13.06% 였다. 한국사회의 종교인구의 절대 다수가 이 세 종교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땅에 천국'을 세우겠다는 신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날이 갈수록 흉악 범죄가 늘어나고 돈이 되는 일라면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다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 감각주의 향락문화가 비뚤어진 소비문화를 주도하고 그 가운 데 깊숙이 종교인들이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추수감사절이면 칠면조를 특별사면 해주면서 죄 없는 이라크 국민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미국대통령을 보면서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를 생각한다. 박홍신부의 모습과 보안법폐지를 결사적으로 막겠다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성경에서 사랑을 가르치는 하나님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한 손으로는 군수산업으로 돈벌이를 하면서 한 손으로 사랑을 말하는 종교인은 예수의 제자가 아니다. 물론 문익환 목사님이나 문규현신부님과 같은 분들이 없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도 예수라는 분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약자의 아픔을 나누어 지겠다는 가장 사람답게 살다 가신 의로운 분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는 예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가진 것이 너무 많아 그것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끊임없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며 살고 있는 사람들 말이다.

거룩하게 폼나게 살기 위하여 가롯 유다처럼 돈과 예수를 바꾸면서 겉으로는 가장 선한 채, 회칠한 무덤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만 예수가 없다'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 예수님이 가장 가난하고 천대받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좋아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자신과 돈을 사랑하든지 예수님을 사랑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세상을 사랑하면서 예수의친구가 되겠다는 것은 예수를 십자가에 다시 못박는 일이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인성교육자료2010.11.03 14:12



구약성서 사무엘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성에 두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한사람은 부자였고 한사람은 가난하였습니다.
부자에게는 양도 소도 많았지만 가난한 이에게는 품삯으로 얻어 기르는 암컷 새끼양 한마리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이 새끼양을 제 자식들과 함께 키우며 한밥그릇에서 같이 먹이고 잘때는 친딸이나 다를 바 없이 품에 안고 잤습니다.

                                            <다윗을 책망하는 나단선지자>

그런데 하루는 부잣집에 손님이 하나 찾아왔습니다.
주인은 손님을 대접하는데 자기의 소나 양을 잡기가 아까와서 그 가난한 집의 새끼양을 빼앗아 대접을 했습니다.'


나단이라는 선지자가 다윗왕에게 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듣고 있던 다윗왕이 괘심한 생각이 들어 "저런 죽일 놈!, 세상에 그럴 수가 있느냐? 그런 인정머리없는 짓을 한 놈을 그냥 둘 수 없다, 그 양 한 마리를 네배로 갚게 하리라."
듣고 있던 나단이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권력의 상징이었던 다윗왕은 나단 선지자 앞에서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소!"하고 회개한다. 다윗왕은 어떤 죄를 지었을까?

다윗은 어느날 밧쎄바라는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보고 그녀에게 정욕을 품고 권력을 이용하여 그녀를 취한다. 그녀가 임신을 하자 자기 백성들에게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변방에서 근무하는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불러서 아내와 동침하게 한다. 우리야는 충직한 신하였기 때문에 근무중에 아내의 방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법률을 지켰다.

              <다윗왕이 취한 우리아의 아내 밧쎄바 -다윗과 밧쎄바 사이에서 솔로몬 왕이 태어난다>

다윗은 자신의 불륜을 숨길 수 없게 되자, 우리야를 전방에 보내 죽을 수 밖에 없는 전투에 참여시켜 우리야가 전사한 후 밧쎄바와 혼인한다. 이때 선지자 나난이 나타나 다윗에게 죽음을 무릅쓰고 직언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윗에게 아내 밧쎄바를 빼앗기고 위험한 전장에 보내져 죽음을 맞았던 우리아>

'가난한 자의 양을 뺏은 죽일 놈'은 바로 다윗 자신이었던 것이다.
성경이 몇천년을 두고 읽힐 가치가 있는 책이 된 이유는 '믿음의 조상인 다윗왕의 나쁜 점까지도 솔직하게 기록해 두었다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라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우리가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나단의 용기"이다.

오늘날 언론이 해야 할 사명은 바로 이 나단 선지자가 하던 일이 아닐까? 권력의 하수인이 되어 비판의 기능을 잃어버린 언론은 나단과 같은 용기가 필요한 때이지만 약자의 목소리를 내야할 때는 벙어리가 되어 권력의 눈치를 보기 바쁘다.

언론뿐 아니다.

지식인은 지금 동면중이다.
소수의 양심적인 지식인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독재자의 당근 앞에서 자기 몫 챙기기에 급급해 왔다. 장시간 근무와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허덕이는 노동자들, 뼈 빠지게 일해도 빗만 늘어나는 농민들의 절규를 외면하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직장을 잃고 거리를 방황하는 노숙자의 원성을 언제까지 귀를 막고 있는 것이다.

서울민국이 되어 전국을 서열화하고 부자들을 위한 정책에 박수를 치고 기득권을 대물림에 서민들 입을 막고 눈을 감기고 있다. 권력이 하사한 당근에 취해 이성도 양심도 잃었다. 성서는 말한다. "너희가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치리라"라고...

어른과 아이가 쌈을 하는 것을 보고 침묵하는 것은 중립이 아니다.

공평하지 못한 싸움에서 방관자는 강자편이다. 일제시대 젊은 이가 총알받이로 혹은 전신대에 끌려 갈때 그들은 일제의 나팔수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승만 독재시대, 박정희 군사파쇼정권,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시대, 이명박독재정치하에서도 권력의 편에서 서민들의 귀를 막고 반민족, 반민주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이 땅의 나단은 없는가?

다윗왕의 말 한마디면 당장 목이 떨어져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나단은 권력 앞에서 민중의 소리를 전달한다.

위장전입에 탈세에 이중 국적을 가지고 애국자행세를 하는 고위층, 자식을 부정입학시키거나 병역을 기피하고 이 땅을 투기의 대상으로 치부하며 온갖 범법행위를 마다하지 않는 양의 탈을 쓴 이리들.... 그들은 아직도 이 땅의 지도자요, 애국자다.

다윗이 민중(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민중) 앞에 철저한 회개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과 밧쎄바는 하느님께 용서받고 지혜의 왕이라 불리는 솔로몬을 낳는다. 증오와 저주의 대상이었던 다윗이 축복을 받은 것이다.  

강자의 회개를 기다린다는 것은 기적을 바라는 일이나 진배없다. 하느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느다고 했다. 구경꾼이 된 국민, 실의와 좌절에 빠진 백성을 도와 줄 신은 없다. 이 땅에 나단이 나타나지 않는 한 민주화도 정의사회도 꿈이다. 침묵의 잠에서 깨어나 하나님을 살리고 분단을 깨뜨려 민족통일을 가져오는 것, 그것이 분단시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 아닐까?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인성교육자료2010.11.02 19:12



김종서라는 가수가 머리를 닿아 여자처럼 묶었다고 T.V에 출연을 정지 당한 일이 있었다.
보수적인 남정네들은 '어물전 망신은 꼴두기가 다 시킨다'거니 '사네 자식이...' 어쩌고 하면서 말이 많았다.

남자는 머리를 닿아 묶으면 안될 이유가 무엇인가? 아이러니하게도 보수를 주장하는 사람들. 아직도 암닭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느니 하는 양반들... 왜 조선 500년간 더벅머리총각들 머리는 안되고 머리는 단정하게 깎아야 남자답다고 생각하는가? 옛날 조선시대는 결혼하지 않은 총각은 처녀처럼 머리를 묶고 다녔다.(남자가 머리를 묶거나 결혼식 때 신부가 연지 곤지를 찍는 것은 몽고족의 풍속이지만...) 치마도 마찬 가지다.
                                               
                           <사진 ; 지난 30일 마산 만날고개에서 있었던 타향축전>

통일 신라시대 이후 줄곧 남자들도 치마를 입고 다녔음을 기록을 통하여 확인 할 수 있다. 지금도 남자들의 두루마기는 분명히 치마형태다. 차가 오른쪽으로 다닌다거나 사람이 왼쪽으로 다닌다든지 하는 것은 머리 모양이나 옷의 모양처럼 사람들이 살아 오면서 편의에 의하여 만들어진 문화 양식이었지 그것이 절대적 진리가 아니었음을 알수 있다.

남녀가 혼인을 할 때 남자의 나이가 여자보다 많아야 한다든지 키가 여자보다 남자가 커야 한다든지 학식이나 환경 조건도 남자가 여자 보다 좋아야 하는것이 절대적인 조건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 법이나 제도란 것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살아 오면서 지배계급이 민중을 지배하기 위하여 만들어 진 이데올로기 중의 하나가 법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가치관이 절대적이라거나 무오류(無誤謬)라고 믿고 있는 경향이 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필연(必然)이며, 현존하는 모든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속에 모순을 갖지 않는 완전 무결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이 모여 살아 오면서 편의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지거나 상호 약속으로 생겨난 것이 말이요 의복이요 관습이요, 도덕이요, 예의요, 법이고 질서, 제도...... 등이다.
이러한 삶의 양식을 문화라고 표현해 보자.

문화란 영어의 Culture로 어원(語源)은 라틴어 Cultra라는 '경작하다' '훌륭하다' '숭배하다'에서 비롯된 Coler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말은 훌륭한 행위와 연관되어 있다. 문화는 "인간, 국가, 계급, 사회집단, 개인에 의해 창조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포함하는 사회현상"이다.

맨손 사냥의 불편은 칼이나 활을 만들게 되고 사회의 토대(원시 사회, 노예제 사회, 봉건제 사회,자본제 사회,공산제 사회)에 따라 가치의식과 도덕, 의복, 언어,생활 양식등의 문화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문화가 사회구성원의 합의에 의한 객관적이고 탈이데올로기적인 순수한 문화가 아니라 계급성을 지녔거나 이해관계에 관련된 상업성을 띠고 있음은 두말하 것도 없다.
일부 다처 사회에서는 칠거지악이나 여필종부, 개가금지 같은 남성 중심의 도덕을 강조하여 여성에게 예속적인 삶을 강요하여 왔던 것이다.

예를 들면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는 여자들의 신발은 발모양과 반대되는 하이 힐(High Heel)을 신고 성적으로 돋보이게 하는 남성중심의 문화가 등장하게 된다.(중국에서는 전족을 해 도망가지 못하도록 애기발처럼 만들었다)
학교에서는 고려자기가 세계적인 자랑거리로만 배웠지만 90% 이상의 민중이 의식주 해결이 어려운 여건에서 만들어졌고, 미적 감각을 가지고 즐거움과 여유를 누리는 고려자기와 같은 문화는 귀족 계급의 문화임에 틀림 없다.

바이올린 한개의 값이 수천만원 하는 가격이라면 오케스트라와 같은 문화는 민중의 문화가 아니다. 문화란 지배계급의 문화와 서민계급의 문화가 있고, 지배계급에 의하여 문화가 종속되면 민중의 문화는 천박하고 저질문화로 인식되고, 귀족문화는 고상하고 고귀한 표준문화가 된다.

매스 미디어가 발달한 사회에서는 자본의 논리나 상업주의 문화가 표준문화가 되고, 전파 매체로 민중 속에 뿌리를 내린다.
광고비도 편성권도 갖지 못한 노동자들의 노래나 삶의 양식은 저질 퇴폐문화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일년내 농사일에 허리 한번 펴지 못하던 농민이 마을 사람들과 작은 돈을 모아 일년에 한번, 버스를 전세 내어 계곡에서 노래라도 부르고, 춤이라도 추면 퇴폐 향략의 저질 문화로 언론의 집중 매도를 당하기 일쑤다.

문화가 탈정치적이어야 한다거나 순수문화 지향적이어야 한다는 논리는 지배계급의 논리이다. 특정 계급의 이익을 위해 다수의 민중에게 속박으로 작용되는 문화는 좋은 문화라고 볼수 없다. 문화란 이렇게 분명히 계급성을 지니고 있음을 간과 해서는 안된다. 오늘날 국적불명의 외국문화가 침투하여 민족문화가 열등문화로 배척당하는 양상은 문화에 대한 정책의 부재나 민족의식의 부족에서 비롯된 비극이다. 자본의 논리에 의해 상업주의 문화가 우리 삶을 오염시켜 감각중심의 향락퇴폐사회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각각의 민족은 그 고유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 강대국의 문화가 약소국에 강압적으로 전파를 강요 당하거나 의도적으로 보급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주체성을 무시하고 무분별한 남의 문화를 모방하거나 수용하는 모습은 민족 문화의 수호라는 차원에서는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자국의 문화에 대한 긍지를 갖지 못하고 열등의식에 젖어 사는 국민은 독립국가의 국민으로서 긍지를 상실한 불행한 일이다. 최근 정부에서는 세계화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민학생들에게 영어교육을 실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여 논란을 빚고 있는 것도 이러한 차원에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문화의 질은 그 나라 국민의 수준을 나타내는 척도가 된다.오늘날 세계화란 이름으로 국적없는 향락문화와 저질적이고 퇴폐적인 외국의 문화가 제국주의 얼굴을 하고 유입되고 있는 것이 현실은 민족문화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우려를 사고 있다.

T.V나 컴퓨터문화 시대에 국수적인 우리 문화의 우수성만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조상이 살아 온 자취를 살펴 그들이 누려 온 삶의 양식을 오늘의 삶의 양식에 맞게 계승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예를들면 서구의 가족제도인 핵가족제도는 무조건 좋은 것이고 전통가족제도의 대가족제도는 전근대적이라고 해석하는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이러한 문화 수용의 자세는 오늘날의 노인 문제를 비롯한 자주성이 없는 마마보이가 등장하는등의 사회문제가 야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전통문화에 대한 긍지와 외래문화의 선별적인 수용은 민족문화의 수용차원에서 고려되어야할 문제이다. 주택의 양식이나 의생활,식생활등 문화 전반에 대한 정책차원의 노력 없이는 민족문화의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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