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 피해자'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3.07.26 ‘폭력 가해사실’ 졸업 뒤 바로 삭제, 불이익 없다? (11)
  2. 2011.05.14 자기 반 친구 보고 ‘바이러스’래요 (39)


‘가해학생을 왜 두둔하느냐?’

 

‘가해학생은 자신이 당한 만큼 똑같이 저도 당해봐야 한다’

 

‘당신 자식이 그런 폭력을 당해도 가해자 두둔할거냐?’

 

학교폭력 가해학생의 인권을 말하면 돌아오는 소리다. 일리가 없는 말도 아니다. 그러나 학교폭력 가해학생을 보복이나 처벌만능주의로 해결하면 가해학생이 개과천선할 수 있을까? 가해학생에게 대학진학이나 취업에 불이익을 주겠다고 학교생활기록부에 기록해두면 잘못을 반성하고 바르게 살아갈까? ‘폭력배’라는 전과 딱지를 붙여 격리시키면 다시는 그런 학생이 나타나지 않을까?

 

속담에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다. 죄는 밉다. 그러나 죄를 지은 학생이 반성해 다시 건강한 사회인으로 적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교육을 해야 할 학교가 학생이 한 일에 대해 전과자 딱지를 붙여 불이익을 주고 격리시키는게 학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일까?

 

 

서남수 교육부 장관은 지난 23일 "학교폭력 가해학생도 반성을 하고 행동이 변한다면 학교생활기록부 기재를 삭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면서 "만약 학생부 기재 사실을 졸업 이전에 삭제하도록 하면 학교폭력 억제 효과가 없어진다"며 "졸업 후 삭제를 통해 당해년도 대학 입시에서 한해서만 영향을 미치도록 하겠다"고 설명했다.

 

교육부는 ‘학생부에 학교폭력 사실을 기록하는 방침은 계속 유지하되 졸업한 뒤 기재내용 보존기간만 5년에서 2년으로 줄인다는 것이다. 다만 반성하고 긍정적 행동변화를 보인 가해학생에 대해서는 졸업사정위원회가 삭제를 요청해올 경우 학교폭력자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졸업 직후 삭제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학교생활기록부에 폭력사실 삭제하면 불이익이 없을까?

 

현재 학교폭력 가해 학생은 폭력 사실을 학생부에 기재해 5년동안 기록에 남겨 불이익을 주도록 하고 있다. 교육부는 학교폭력을 근절한다는 명분으로 학교폭력 가해자에게는 폭력의 정도에 따라 ‘사회봉사나 특별교육, 출석정지, 전학, 퇴학’ 등의 폭력 내용을 기록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침에 대해 시민사회단체는 물론 국회 입법조사처조차 ‘학교폭력 학생부 기재가 위헌소지가 있다’는 입장을 발표하는가 하면 국가인권위원회는 졸업 전 삭제 심의제도나 중간 삭제제도를 교육부에 권고한바 있다.

 

정부의 ‘현장중심 학교폭력 대책’의 문제점

 

가해학생을 처벌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이미 가해학생은 행위에 상응하는 사회봉사나 출석정지 혹은 전·퇴학과 같은 처벌을 받았다. 처벌을 받은 후 다시 생활기록부에 나겨 취업이나 진학에 불이익을 주면 학교폭력이 줄어들고 가해학생이 반성할 것이라는 게 정부의 기본 입장이다.

 

 

 

달라진 것은 5년동안 기록을 2년으로 줄인 것과 학교폭력자치위원회의 심의를 거치면 삭제할 수 있도록 했다는 차이다. 전교조를 비롯해 신민단체들은 "이 같은 낙인과 진학불이익 방식은 학교 내 갈등과 다툼을 확산하고 처벌 중심의 문화를 유도하게 되는 문제가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정부의 학교폭력 대책, 무엇이 문제일까?

 

첫째, 기본권의 침해다.

 

지금까지 헌재 판례는 공익에 비해 기본권을 필요 이상 침해하는 것을 금지하는 ‘과잉금지의 원칙’으로 간주해왔다. ‘학교폭력 가해학생의 사실을 졸업 후에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취업과 진학에 영향을 받을 것이며 기본권 제한이 된다’는 주장과 “교과부가 학교폭력 가해 학생에 대한 정보를 수집·보관하는 행위는 해당 학생의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의견도 있어 위헌심판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둘째, 학생부 기재는 ‘이중처벌’이다.

 

학교폭력 가해자는 자신의 행위로 ‘사회봉사나 특별교육, 출석정지, 전학, 퇴학..’과 같은 처벌을 이미 받았다. 그런데 또다시 학생부에 폭력사실을 남겨 ‘진학이나 취업’ 등에 불이익을 받게 한다는 것은 이중처벌이라는 지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세째, 형평성에도 문제가 있다.

 

올해 졸업생부터 학생부 기록에서 삭제 한다면 지난해 이전까지 학교폭력가해자들에게 남겨 진 기록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올해부터는 삭제된다지만 지난해 이전의 졸업생들은 삭제할 길이 없다. 같은 행위로 지난해 이전의 가해자와 올해 이후의 가해자에 대한 형평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넷째, 기준이 모호하다.

 

교과부는 ‘가해학생이 반성하면 학생부에 기재된 사항을 삭제해준다’고 하지만 그 반성의 행동변화 정도를 판단할 모호하다. 무엇으로 판단의 근거를 삼을 것인가?

 

해법은 없는가?

정부까지 나서서 폭력과의 전쟁을 선포한 학교폭력... 교육부는 언제까지 처벌만능주의를 고집할 것인가? 학교폭력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말처럼 현장중심의 소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폭력이 나타나게 된 원인을 알아야 한다. 처벌중심의 해결이 폭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사실은 그동안 대책이 무색하다는 것으로 증명되고 있다.

 

‘경쟁교육 완화, 학급당 학생수 감축, 학생과의 만남 시간확보하기 위한 학교업무정상화, 치유와 화해를 통한 공동체 회복 중심의 학교 폭력 대책’과 같은 현장의 목소리는 왜 외면하는가? 현장교사를 들러리로 세우면서 어떻게 학교폭력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인가?

 

이미지 출처 - 구글 검색에서...

 

김용택의 참교육 이야기 - 10점
김용택 지음/생각비행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얘, 얘~, 저기 ‘바이러스’ 온다”

“재수 없다, 저리가자”

뒤에 자기반 선생님이 따라 온다 것도 모르고 친구 서너명이 앞에 가는 같은 반 친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초등학교 3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딸에게 들은 얘기다. 딸은 직원 모임이 있어 급히 지나쳤지만 그냥 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직생활 10년이 넘고 보니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을 문젠지 아닌지 구별이 되는 모양이다.

‘바이러스’라고 왕따를 당하고 있는 아이는 다른 애들보다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 때문이란다.


‘바이러스’란 뭔가? ‘동물, 식물, 세균 따위의 살아 있는 세포에 기생하거나 세포 안에서 증식하는 미생물’이다. 원래 뜻은 그렇지만 ‘컴퓨터를 비정상적으로 작용하게 만드는 악질적인 프로그램’을 바이러스라고 한다. 아이들이 말하는 뜻은 상종 못할 '병균’을 가리킨다.

어떻게 같은 반 친구를 ‘병균’ 취급을 할까? 그것도 몇 사람이 한 친구를...?

딸의 얘기를 듣고 생각해 보니 ‘바이러스’라고 왕따 당하는 학생보다 왕따를 시키는 아이들이 더 문제인 것 같다. 무엇이 이 아이들로 하여금 친구를 더불어 함께하는 존재가 아니라 병균이나 퍼뜨리는 상종 못할 존재로 여기게 했을까?


학교사회는 언제부터인지 못생긴 아이. 공부 못하는 아이, 가난한 아이들을 왕따 시키고 같은 친구로 취급하지 않는 분위기가 됐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끼리, 부잣집 아이들은 부잣집 아이들끼리, 잘생긴 아이들은 잘 생긴 아이들끼리... 이렇게 교우(敎友)가 되어 공부하는 학급에서 인성교육이 가능할까? 공부를 못하는 아이를 왕따 시키는 것도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가난한 아이나 못생긴 아이들이 왕따 시키는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아이들의 문화는 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엄마는 어떤 친구와 만나 어떤 대화를 주고받는지, 텔레비전의 연속극이 어떤 내용으로 채워지는지, 아이들은 민감하게 듣고 배운다. 그래서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나온 것이 아닌가?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환경의 중요성을 알고 교육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다.

의도적인 교육기관인 학교가 못생겼다는 이유로 혹은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왕따 시키는 분위기에서 진정한 교육이 가능할까? 친구가 적이 되는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지식전달이 인간관계보다 소중하다고 할 수 있는가? 이런 분위기에서 왕따 당하는 학생은 차라리 학교에 다니지 않는 것이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지 않겠는가? 왕따 당하는 학생이 아니라 왕따를 시키는 학생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다.


엄밀하게 따지면 왕따를 시키고 있는 학생도 피해자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공부 잘하는 사람들만 모여 사는 세상도 없지만 그런 세상에 저희들끼리만 살 수도 없다. 자기보다 못났거나 공부를 못하는 학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고방식은 저보다 더 잘난 학생, 더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을 만나면 다시 왕따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국어 점수 몇 점, 수학 점수 몇 점 더 많다고 인간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아이들에게는 국어 낱말 몇 개, 영어단어 몇 개를 깨우쳐주기보다 자신을 던져 이웃을 위해 살았던 분들의 감동을 받게 하는 게 옳은 교육이다. 슈바이처 박사까지 거론할 필요가 없다. ‘울지마 톤즈’라는 영화를 통해 너무나 잘 알려진 이태복 신부님은 왜 아프리카에서 자신의 건강조차 돌보지 않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살다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까? 평생을 고생, 고생해서 번 돈을 불우한 학생들을 위해 장학기금으로 내놓는 사람들은 왜일까?

딸에게 말해줘야겠다. 아이들에게 일과가 끝나면 매일 하루 한가지씩 동화를 들려 주거라. 그리고 왕따를 당한 학생은 장점을 찾아 전체 학생 앞에서 칭찬을 해 주는 것더 한 방법이 되겠구나. 그리고 그 잘난 채 하는 학생들. 그들을 위해 시간이 나는대로 감동 받을 수 있는 영화를 전체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개인별 과제로 좋은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도록 해 보아라. 혹 이런 방법이 무너져 가는 교실을 바로 세우는데 작은 도움이라도 됐으면 좋겠다. 

더불어 사는 세상은 만들 수 없을까? 몸이 불편하거나 병든 아이. 못생긴 아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혹은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없인 여김을 당하는 아이들이 있는 학교는 좋은 학교가 아니다. 머리가 똑똑한 아이보다 가슴이 따뜻한 아이로 키우고 싶어하는 교사. 그런 교사들이 교단을 지키고 있을 때 교실은 무너지지 않는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