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혁명선언'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11.04 신채호와 최남선의 삶
  2. 2009.07.04 신채호선생님은 아직도 무국적자? (7)
인성교육자료2010.11.04 07:02



우리 역사를 살펴 보면 참으로 위대한 삶을 사신 분도 있고, 개인의 영달과 욕심의 노예가 되어 부끄럽게 살다 간 사람도 있다.
신채호 선생님과 최남선의 삶을 예로 들어 역사앞에 부끄럽지 않게 사는 삶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자.

단재 신채호 선생님은 얼굴을 씻을 때 머리를 들고 씻어 가슴과 웃옷에 물이 젖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남자가 어찌 땅을 보고 세면하느냐"고, '고개를 숙일 수 없는' 기백이 독립투쟁에서나 역사서술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선생님은 충북 청원군 남성면 귀래리에서 신숙주의 후손으로 태어나 20세에 오늘날 국립대학의 교수격인 성균관 박사를 지냈다.

조국이 일제의 침략을 받자 벼슬을 버리고 독립신문의 후신인 황성신문사에 들어가 장지연, 박은식과 함께 일제침략에 항거하고 친일파를 매도하는 논설을 썼다.

1910년 나라가 무너지자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여 민족혼을 일깨우는 해조신문를 간행하기도 하고 상해 임시정부 창건 중심인물로 활약하면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의정원 전원위원장에 추대되기도 했다.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의 독선적이고 주도권 잡기에 급급하는 모습을 보고 분연히 결별하고 순한글신문인 '천고'를 발행하기도 하고 친일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폭력투쟁조직인 의열단을 만들기도 했다. 의열단의 강령과 행동목표인 그 유명한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기도 하고, 수많은 시론과 독사신론, 논설, 소설 등을 썼다.

일제에 대한 폭력혁명투쟁을 준비하던 중 체포되어 10년 실형을 받고 8년째 복역하다가 57세의 나이로 여순감옥에서 "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들의 발끝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하여 재를 바다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독립운동가요, 사학자요, 언론인인 선생님은 민족과 하늘에 한점 부끄럼없는 일생을 마쳤다.

육당 최남선은 신채호 선생님보다 10년 후인 1890년 한약방의 주인이요, 관상감 소속의 지관의 아들로 고려 최영 장군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열 다섯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다 교장으로부터 "조선민족은 열등하여 교육을 시킬 필요가 없다"는 말을 듣고, 스트라이크를 일으킨 주동자로 몰려 최린과 함께 퇴학당하고 조국으로 돌아 온다.


을사늑약조약이 맺어지고 황성신문에 배일논조의 투고를 했다가 구류를 당하기도 한다.

열일곱살때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지리과에 입학, 이광수와 만나 유학생 회보의 편집을 맡아 민족의식을 고취하기도 한다.


3.1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부터 그의 투쟁의욕은 한계를 보이기 시작하여 민족대표 33인에서 빠지기도 하고 "민족자결은 이상에 불과하다", "독립선언은 내가 썼다고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등 책임없는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3.1운동 대표 48인의 한사람으로 2년 6개월 형의 선고를 받고 13개월만에 석방된다.

1925년 동아일보에 객원이 되면서 부터 수많은 사설을 쓰고, 조선사 편찬위원회 위원으로 촉탁이 되어 일제의 구미에 맞는 일들을 하게 되자 한용운, 정인보 등은 그를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여 상대도 하지 않는다.


그 뒤, 일제의 괴뢰신문 '만몽일보'의 고문이 되고, 독립투사를 잡아 고문살육을 저지르던 관동군이 세운 '건국대학'의 교수로 취임한다.


그가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있을 때 월급이 무려 300원(이 돈은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450만원이상이 됨)을 받았으니 일제의 침략정책에 협조하여 민족의 눈을 감기고 귀를 막아준 배신의 댓가로 받은 기록은 지울 길이 없다.


1945년 조국광복을 맞아 친일 부역배로 잡혀 이광수, 최린과 함께 서대문 감옥에 갇혔다가 독립 선언문을 쓰던 손으로 자기 반성문인 자열서를 쓰고 출감한다.


수난의 역사속에 태어났다가 앞에서 살펴본 신채호 선생님이나 박은식, 안재홍, 장준하 선생님과 같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자기 한몸을 던져 조국광복에 바친 위대한 분도 많다.

그러나, 변절의 명수로 친일, 친미, 독재지지로 명예와 출세를 따라 갈대와 같은 삶을 산 사람도 적지 않다.


우리는 그들의 부끄러운 삶을 들추어 민족역사의 치부를 보기를 원치 않는다.

문제는 우리와 함께 사는 오늘의 인물이 최남선, 최린, 이광수, 송진우...... 같은 인물이 있다는 것이다.


분단을 담보로 외세에 결탁하여 출세를 보장받기도 하고, 혁명을 가장하여 국민을 총뿌리로 위협하여 온 영토를 군사문화와 부패의 씨앗을 뿌린 사람도 있고, 불의앞에 한치 부끄럼없이 살다가 감옥살이 고문에도 마다하지 않고 역사의 등불로 사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삶은 자신이 책임질 일이지만 그들의 지조와 변절이 민중을 지키기도 하고 배신한다는 관점에서 결코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특히, 지도자로 존경받던 인물들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오늘을 사는 우리는 '역사의 빚을 갚아야 한다'(역사의식)는 최소한의 양심을 가지고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정치2009.07.04 19:14


한말 언론·교육·신민회(新民會) 활동을 통해 계몽운동을 전개한 분 . 중국 망명 후에는 무장투쟁에 의한 독립운동노선을 견지하면서 외교론 중심의 상해 임시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에서 활동했으며, 1920년대 중반 이후 무정부주의 단체에서 활동했다. 또한 역사연구를 통해서 한국근대역사학의 방법론과 인식을 성립시켰다.」

이 분이 누굴까? 이 정도 소개로 우리나라에서 “아~! 그 분...” 하며 알아맞힐 사람은 입시를 준비하는 고교생을 제외하고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다.


조선의 독립운동가요, 민족사학자이신.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선생님!

김삼웅선생님은 신채호평전에서 이렇게 썼다.

단재 선생님.

이제서야 당신을 알게 되어 죄송합니다.

당신의 노력으로

제가 이리 행복한 것을 이제서야 알았습니다.

너무나 죄송합니다.

그런 당신이 아직 국적도 없다니

너무나 죄송합니다.

저는 너무 제 자신만 생각했습니다.

나라가 무엇인지

민족이 무엇인지

뒷전이었습니다.

당신의 삶 앞에 제 삶은 초라합니다.

당신의 처절한 삶이 있었기에

제 평화로운 삶이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너무나 죄송합니다.

앞으로 힘들 때 마다 짜증날 때 마다

당신을 생각하겠습니다.

나의 힘듦이나 짜증은 힘듦도 아니요, 짜증도 아닌 것을

느낄 것입니다.

앞으로 행복할 때나 즐거울 때마다

당신을 생각하겠습니다.

이 또한 당신의 앞선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니까요.

다시 한번 당신의 고마움을 너무 늦게 알게

너무나 죄송합니다.

그 대신 앞으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요양을 한다고 와 있는 청주생활 1년!
외손자 재롱을 보며 보낸지도 두달이 넘었다. 짜증스런 더위도 식힐겸 찾은 신채호 선생님 사당. 사실 신채호선생님의 사당을 찾은 건 오늘이 처음이 아니다. 이 근처에 선생님의 묘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수요일... 물어 물어 찾아 간 충북청원군낭성면 귀래리 305번지...

“볼 것도 없는데 그긴 뭣하러 가요?”

길을 묻는 나에게 이웃주민의 대답이다. '볼 것도 없는 곳... 온 몸바쳐 조국을 위해 살다가신 고결한 삶이 이런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2009년 3월1일. 97년만에 가족등록부에 이름이 올라감으로서 이제야겨우 국적을 회복 하였다나?   

사진기에 메모리카드를 빼놓고 와 다시 찾은 선생님 사당....
‘토요일인데도 넓은 주차장에는 텅텅 비어 있고 사람이라고는 눈닦고 찾아봐도 없다. 


안내원도 없는 사당에 묵념을 하니 만감이 교차한다.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일천 년 이래의 제일 사건(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묘청의 난’으로 기록된 한국사 교과서를 배운 지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역사 해석. 너무나 큰 선생님의 민족 의식, 역사의식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민족의 역사가 사대주의 사이비 사가들, 친일사가들의 농간으로 뭍힐번했던 우리 역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당과 묘역을 둘러보는 시간 내내 마음 속으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 곳을 둘러 본 사람이라면 '죄스럽고 미안하다'는 생각은 나만의 회한일까? 

단제선생님의 삶을 보면 이런 대접을 받아도 좋을까? 
26세에 박사가 된 선생은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언론을 통해 뛰어난 문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며 그 문명을 날렸던 선생님!

1880년 12월 8일 충남 대덕에서 출생
1898년 성균관 입교, 독립협회 운동에 참여
1906년 <대한매일신보>에 논설진으로 초빙됨
1910년 안창호 등과 중국으로 망명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신문> 주필로 활동
1914년 옛 고구려 땅 답사 이후 대고구려주의적 역사의식 갖게 됨
1915년 북경에 체류하며 <조선상고사> 집필
1916년 소설 <꿈하늘> 집필
1920년 박자혜 여사와 북경에서 결혼. 다음에 아들 수범씨 얻음.
1922년 '의열단'의 행동강령인 '조선혁명선언'을 기초
1924년 무장독립운동단체 '다물단' 선언문 기초
1925년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가입
1927년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
1928년 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 발표
1930년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국제위폐 사건에 연루돼 체포됨. 대련 법정에서 10년형 선고받음. 여순감옥으로 이송
1936년 2월 21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셨다.


<자료 : 월간개벽 2007.03월호>

우여곡절 끝에 1993년 11월 충북청원군낭성면 귀래리에 뭍히시기는 했지만 찾는 이 없는 초라한 사당은 '충청북도 기념물 제 90호'라는 칭호가 부끄럽다.

사당 입구에 선 비 천고(하늘 북-'천둥소리'라는 뜻으로 그가 베이징에서 창간한 한문잡지 이름)는 단재의 절규처럼 들려 찾는 이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吾知鼓天鼓者 其能哀而怒矣
哀聲悲怒聲壯 喚二千萬人起
乃毅然決死心 光祖宗復疆土
取盡夷島血來 其흔於我天鼓

나는 아네 하늘북 치는 사람을/그는 슬퍼하기도 성내기도 하네
슬픈소리 서럽고 노한 소리 장엄하여/이천만 동포를 불러일으키나니
의연히 나라 위해 죽음을 결심케하고/조상을 빛내고 강토를 되찾게 하나니
섬 오랑캐의 피를 싸그리 긁어 모아/우리 하늘북에 그 피를 칠하리라

단재의 시 <하늘북> 전문 -박정규 역(오마이뉴스)

천고뿐만 아니다. 입구 안내판에 성난 도종환 시인의 '고드미마을에서'가 왜 그렇게 초라하게 보이는지.

고드미마을에서 - 도 종 환 -

이 땅의 삼월 고드미마을에 눈이 내린다
오동나무함에 들려  국경선을 넘어 오던
한 줌의 유골같은 푸스스한 눈발이
동녁골을 넘어 이곳에 내려온다.

꽃뫼마을 고령신씨도 이제는 아니오고
금초하던 사당지기 귀래리 나뭇군
고무신자국 한 줄 눈 발에 지워진다.

복숭나무 가지 끝 봄 물에 탄다는
삼월이라 초하루 이땅에 돌아와도
영당각 문풍질 찢고 드는 바람소리
발 굵은 돗자리 위를 서성이다 돌아가고
 
옥하리 냇가에 봄이 오면 꽃이 피어
 바바람불면 상에 누워 옛얘기 같이하고 
서가에는 책이 쌓여 가난걱정 없었는데
뉘 알았으랴 쪽발이 발에 채이기 싫어
내 자란 구둘장 밑 오그려 누워 지냈더니

오십년 지난 물소리 비켜 돌아갈 줄을
 눈녹이 물에 부리적신 진달래 창꽃들이
앞산에 붉게 돋아 이 나라 내려볼 때
이 땅에 누가 남아 내살 네살 썩 비어  
고우나고운 핏덩어릴 줄줄줄 흘릴건가
이 땅의 삼월 고드미마을에는 눈이 내리는데.  

이건 또 뭔가? 칮는 이 없는 쓸쓸한 사당에는 위대한 독립운동가요 민족사학자인 신채호 선생님에게 살인자 노태우의 훈장증이라니...? 국민의 주권 도둑질도 부족해 독립운동가까지 이용해 먹겠다는 심산이 괘심하고 또 괘심하다.
 
텅텅 빈 주차장은 위대한 애국자의 이름에 걸맞지 않게 을시년스럽고 공허하다. 
찾는 이 없는 선생님의 사당에는 네살짜리 외손자가 신기하듯 쳐다보고 있다.
이 녀석은 언제 알까? 선생님의 위대하신 삶을....
"두원아! 선생님은 훌륭한 선생님이야!" 삶과 죽음의 간극이란 할아버지와 손자의 나이 차 만큼이나 될까?
"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들의 발끝에 채이지 않게 화장하여 바다에 뿌려달라"던 생전의 선생님 부탁을 들어주지도 못했단다. 후손을 위해 무덤을 쓰자는 문중과 지인들의 뜻이 너무 거세었던 때문이다. 결국   일본놈들은 유해를 묻는 일마저 방해해 가족과 일가들은 단재의 집터 귀래리에 몰래 묻어야만 했다.
민족을 배반한 반역자의 무덤은 호화판이고 독립운동을 하면 자자손손로 초라한 거지신세를 못면하는 나라. 가난이 부끄러운 나라에서는 정의감을 가지고 살거나 민족을 위해 한 몸 바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를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군사정권은 그렇다치고 민주정부조차 외면한 선생님의 생애. 달랑 생색내기 무덤 하나 세워 준 것으로 끝나고 팽개친 흙더미가 빗물에 씻겨 내린 흔적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언제쯤이면 위대한 독립운동가요 ,민족 사학자인 선생님의 삶이 바른 평가를 받을 수 있을런지....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