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남쪽바다'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3.05.05 마산역에는 왜 가고파 노래만 들려줄까? (13)
  2. 2012.09.27 민주의 성지 마산에서 역사를 만나다 (33)
정치2013.05.05 07:00


 

                                            <이미지 출처 : 오마이 뉴스>

 

기차를 타고 마산역에 내리면 ‘내고향 남쪽바다...’로 시작하는 '가고파'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학교 시절에 배웠던 노래에 대한 추억과 노랫말에 취해 마산이라는 정서가 피부로 와 닿게 하려는 마산역의 배려일까?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낙천적이고 단순하게 볼일만 아이다.

 

가고파라는 시의 작곡가 이은상이 누군가?

 

이은상은 이승만시대에는 이승만을 '이순신 장군 같은 분'이라며 칭송하고 3·15의거와 4·19항쟁을 '무모한 흥분' 내지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 '불합리, 불합법이 빚어낸 불상사'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던 인물이다.

 

"4·19혁명이 성공하자 수유리 묘지의 4·19학생혁명 기념비에 4·19를 찬양하는 비문을 쓰고 전두환이 군사쿠데타를 일으키자 '한국의 특수한 상황으로 보아 무엇보다도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는 것이 거의 일반적인 여론'이라는 글을 쓰기도 했던 철저한 기회주의자다.

 

마산시민들은 마산이 4.19혁명의 단초가 된 3.15의거와 유신정권을 무너뜨린 부마항쟁의 숨결이 서린 곳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있다. 지금은 비록 새누리당의 아지트가 되고 말았지만 역사를 바꾼 긍지와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도시다. 이런 정서가 깔린 마산이라는 곳에 친일과 친독재의 인물이기도 한 이은상의 시비를 건립하자 논쟁이 시작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산역을 찾는 사람들은 기차에 내려 엘리베이트를 타고 마산 역광장으로 내려서려는 순간 눈앞에 진귀한(?) 풍경이 펼쳐진다. 아름답게 꾸며진 역광장 정면에는 전에 없던 검은 페인트를 뒤집어 쓴 이은상의 가고파 시비가 세워져 있고 시비 위에는 서로 정반내의 주장을 한 현수막이 걸려 보는 이들로 하며금 어리둥절케 하고 있다.

 

‘시민 여러분 진실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민주와 정의입니까?’ 라는 현수막 아래는 깨알같은 글씨로 '마산과 조국을 사랑한 노산선생은 3.15를 폄하하지 않았다.’로 시작하는 이은상의 공로가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다.

 

그 아래는 ‘ 3. 15가 통곡한다. 이은상 미화석 철거하라!’ 라는 현수막도 걸려 있다. 현수막 아래는 ‘내고향 남쪽바다 그파란 물 눈에 보이네...’로 시작하는 이은상의 시 가고파가 검은 페인트를 뒤집어 쓴채 얌전하게(?) 앉아 있다.

 

가끔 지나가는 행인들이 신기한 듯 쳐다보곤 한다.

지난 달에 마산에 갔을 때 기차에서 내리자말자 흘러나오는 가고파 노래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다른 노래와 함께 나오는 게 아니라 연달아 가고파 노래 한곡만 반복적으로 계속 흘러 나오는 것이었다. 이은상 시비문제가 마산의 시민단체와 시비를 세운 측과의 첨예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 노래가 아주 기분 좋게만 들리지 않았다.

 

                                            <이미지 출처 : 오마이 뉴스>

 

집으로 돌아오려고 역사를 다시 찾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합실에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시간에도 계속 가고파 노래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차시간이 바빠 그냥 돌아오기는 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마산 역사(驛舍)에 왜 논쟁의 주인공의 노래만 듣게 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생각으로 심란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러고는 잊고 지냈다. 그러다 지난 2일 경남도민일보 독자권익위원회의에 참가하려고 다시 마산 역에 내렸을 때 일이다.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역시 똑같은 노래가 기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대로 둬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서 역장을 만나 항의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역장실로 찾아갔다. 마침 역장은 출타중이어서 부역장(서정길)을 만났다.

 

“부역장님! 마산 역에 내리는 손님들은 왜 가고파 노래만 들어야 합니까?”

부역장의 눈이 둥그레졌다. 머리가 허연 할아버지가 느닷없이 꺼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되는 모양이었다.

 

가고파시비문제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을 부역장이 머리가 허연 사람이 이은상을 칭송은 못할망정 가고파 노래를 방송하는 문제를 따지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일까?

눈이 휘둥그래진 부역장을 향해 다시 말했다.

 

“마산역에는 가고파 노래 한 곡 뿐입니까? 그리고 지금 마산에는 이은상 시비문제로 논란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첨예한 문제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가고파 계속 반복해서 방송하는 저의가 무엇입니까? 시비건립에 찬성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는데 마산역은 왜 한쪽 편을 들어 논란의 중심에 서려고 하는게지요?”

가까스레 감을 잡은 부역장은 할 말이 없는 모양이다.

 

“어떻게 하라는 얘깁니까?”

 

“다른 노래를 들려주든지 방송을 하지 말아야지요. 논쟁이 끝나고 난 후 방송을 하든지 말든지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변명을 하려고 했다.

 

“민원입니다. 민원을 접수해야하지 않습니까?”

 

A4용지 한 장을 픽 던지다시피 책상위에 내놓았다.

 

“나보고 적으라는 겁니까?”

 

“민원 용지를 주세요!, 고객을 상대하는 공공기관에서 민원 문제가 발생하면 처리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게 없는데...!”

어처구니가 없다. 정말 없는지 있어도 없다고 하는 건지....

 

“인터넷에 직접하는 방법은 있긴 있는데....”

머리가 허연 사람이니까 인터넷에서 직접 민원 처리를 하라면 항복하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일까?

 

“좋습니다. 내가 쓰지요?”

부역장의 자리를 비켜주며 직접 민원을 작성하라는 것이었다.

 

                                         ‘가고파 노래 중지 요청건’

 

‘지난 달에 마산에 왔을 때도 그랬고 오늘 또 마산역에 도착하자말자 가고파 노래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습니다.

 

마산은 지금 이은상시비 건립문제로 심각한 갈등과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줄 압니다. 그런데 공공기관인 마산역은 왜 시비건립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는 이은상의 가고파 노래만 반복해서 보내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도 다른 노래와 함께 보내는 게 아니라 가고파 한곡만 계속해서 보내는게 옳은 일인지요?

 

앞으로 논쟁이 끝날 때까지 가고파 노래 방송을 중단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2013년  5월  2일  민원인 김 용 택

                                                                                마산역 부역장 서 정 길(인) 

 

민원을 접수하고 나오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마산 역을 지나갔을텐데 왜 아무도 이이제기를 하지 않았을까? 가고파를 들은 사람들 중에는 이은상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침묵하는 구성원들이 모인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이-메일로 처리결과를 알려주겠다는 확약을 받고 역사를 빠져 나왔다. 마산 역 앞에는 새순들이 펼치는 꽃보다 아름다운 봄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광장 앞에는 가고파 시비 건립에 대한 뜨거운 논쟁의 열기로 한여름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렌즈에 비췬 세상2012.09.27 07:00


 

                                             <이미지 출처 : 구글 검색에서..>

 

마산시(馬山市)는 없다. 2010년 7월 1일 인근의 창원시·진해시와 합병하여, 2012년 현재 창원시 마산합포구와 마산회원구로 남아 있는 인구 30만의 초라한 도시로 바뀌었다. 마산은 한때 우리나라 7대 도시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큼 번성했던 도시다. 역사적인 도시. 3.15민주성지의 땅이 오늘날 이름까지 창원시로 바뀐 도시로 바뀌었다.

 

마산하면 1960년 3.15의거나 1979년 박정희 유신체제에 저항했던 부마항쟁을 연상하게 된다. 경찰에 죽임을 당하고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올라 4.19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던 도시 마산. 그 마산을 찾았다.

 

‘내 고향 남쪽바다~’ 라는 이은상작곡 노래로 혹은 물 좋은 마산으로 연상되기도 하는 지금은 이름조차 창원시에 빼앗겨 마산 살리기에 안간 힘을 쏱고 있다.

 

마산 하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총면적 953,576㎡의 규모의 정부에서 직접 관리하는 국가산업단지다. 현재 마산자유무역지역에는 외국인단독투자, 합작투자, 내국인업체 등 90여개사가 입주해 있으며 총생산의 98%를 수출 하고 있다. 

 

 

마산은 한때 한국에서 현금이 가장 많이 도는 도시로 1970년 5월 마산수출자유지역 착공 후 한일합섬을 비롯한 많은 기업들이 마산에 산재하고 있었다. 특히 외국인 기업가 투자유치 지역으로 지정되면서 노동자 5만여 명이 일하는 전국 7대 도시이자 경남 제1의 도시이기도 했다.

 

그랬던 마산이 급속하게 진행되는 외국자본의 철수로 속수무책이 되고 한 때 노동운동의 메카로 알려져 있던 마산은 ‘모범사례 1위에서 실패사례 1위’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마산시청까지 창원에 뺏기고 한 때 50만이 넘던 인구가 30만으로 줄어든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옛날의 영화는 일장춘몽으로 사라지고 마는가?

 

                                             <이미지 출처 : 구글 검색에서..>

 

마산은 수출자유지역이라는 경제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3.15와 부마항쟁의 민주주의 역사의 성지요 식민지시대 일제 수탈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경제는 어려워지고 시라는 행정단위가 구로 바뀌기는 했지만 마산이 갖고 있는 역사적 의미는 결코 사라질 수 없다.

 

 

나는 경남대학교와 창원대학교 교수들과 함께 사라져 가는 마산의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1980년 초부터 ‘마산 창원 지역사 연구회’를 만들어 정치, 경제, 노동, 교육 등 각 분야의 역사 찾기와 ‘마산창원역사 읽기’(1989년 불휘출판사)를 출간하는 등 노력을 계속했던 일이 있다.

 

지역사 연구회는 서울문화가 표준문화가 된 현실에서 마산의 역사, 정치사, 경제사, 교육사, 종교사... 등을 발굴해 지역의 역사를 되찾겠다는 의지로 지금도 그 일을 계속해오고 있다.

 

마산의 역사를 찾아서

 

<몽고정>

 

                                             <이미지 출처 : 구글 검색에서..>

 

고려시대 충렬왕 원년 (1281년) 원나라 세조가 여몽연합군에 의한 2차례의 일본 정벌에 실패한 뒤, 같은 해 10월에 남해안 방어를 위해 지금 마산시 정수장 일대의 환주산에 군사를 배치하고 진을 설치하였다. 이곳에 주둔한 군사들에게 마실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이 몽고정이다.

 

원래는 고려정이라는 명칭으로 불려 왔으며, 우물 앞에 몽고정이라 쓰인 비석은 1932년 일본인 단체인 고적보존회가 세운 것이다.

 

<일제시대 교도소였던 한국은행 자리>

 

                                             <이미지 출처 : 구글 검색에서..>

 

지금은 주식회사 부영이 매입해 유로 주차장으로 돈벌이를 하고 있는 자리는 옛 한국은행터다. 이 터는 일제치하에 부산감옥소 마산분감이 있었던 자리다. 1919년 기미독립운동 당시 8명의 희생자와 수많은 부상자를 냈고 삼진의거에 참여하였던 항일 민족지도자들과 독립운동 가이자 정치가였던 박순천과 정진업이 수감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승만의 부정선거와 3.15의거>

 

                                             <이미지 출처 : 구글 검색에서..>

 

1948년 제헌국회에서 국회의장에 피선된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을 지낸 후, 1952년 자유당을 창당하면서 2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1954년에는 대통령의 3선 금지조항을 고쳐 실질적인 종신 대통령의 길을 마련하기 위한 개헌안을 내놓았으나 국회에서 부결되자, 사사오입 논리를 적용하여 부결을 번복하고 통과시킨다.

 

1956년 3선에 성공한 이승만은, 장기 독재에 대한 국민의 비판통로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1958년 8월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다. 야당과 언론의 거센 항의에도 불구하고 1959년 1.15일 신국가보안법발동, 3 · 15 부정선거를 획책한다.

 

1960년 5월 중에 실시하기로 되어있는 정·부통령 선거를 2개월 앞당겨 3월 15일 실시한다. 그것도 40%사전투표와 3인조 5일조로 구성된 관권선거는 급기야 마산의 민주당에서 선거무효를 선언하고 시위에 나서자 시민들이 동조, 결국 마산상고 입학생이었던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자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 4.19혁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부마항쟁의 역사>

 

                                             <이미지 출처 : 구글 검색에서..>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대한민국의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 창원시에서 유신 체제에 저항해 일어났던 민주화 운동이다. 부산에서는 10월 16일 오전 10시에 시작된 부산대생들의 교내시위가 순식간에 4,000여 명으로 불어나면서 거리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부산시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부상자는 16일 하루 동안에만 학생 5명, 일반시민 10명, 경찰 95명 등 도합 110명으로서 그 가운데 중상자는 18명이었다. 18일 부산 일원에 계엄령이, 마산에는 위수령이 선포되고, 전방 공수부대 2개 여단 5,000여 명이 부산에 투입되었다.

 

마산에서는 10월 18일 경남대 학생 1,000여 명이 기동 경찰 300여 명과 대치하다 투석전을 벌였고, 3·15의거탑에서 1,000여 명이 스크럼을 짜서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 및 언론자유를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는 등 시내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미지 출처 : 구글 검색에서..>

 

부마항쟁은 단순히 '70년대 반유신운동의 귀결점으로만 머물지 않고 그 철옹성 같던 박정희의 유신정권을 붕괴시킨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데 역사적인 이이가 있다고 할 것이다.

 

마산의 역사는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의 자취이기도 하다. 식민시대의 신마산은 아직도 일제시대의 집들이며 유적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구마산의 상가에는 옛 조창터와 일제시대 최초의 조선인 무역회사인 원동무역주식회사가 있었던 자리터도 남이 있다. 지금은 친일인사로 빛이 퇴락한 이은상과 이원수, 김혜랑이 마산사람이라는 걸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안다.

 

 

 

 

 

 

 

 

 

 

 

마산을 일컬어 민주성지라고도 한다. 지금은 새누리당의 텃밭이요, 감자바위라는 소리를 듣는 도시가 됐지만 과거 3. 15의거가 부마항쟁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일제 식민지시대는 물론 독재 권력에 저항했던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 그 역사를 살려내는 노력은 창동 예술촌 100일기념 축제를 계기로 지속적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