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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수준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

by 참교육 2011.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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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어떤 사람은 맛있어 하고 어떤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똑같은 음악을 들으면서도 감동에 겨워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같은 책을 읽고도 느낌이 각각 다르다. 이러한 현상은 개성이나 다양성의 문제만은 아니다.

개인의 가치관이나 수준의 차이다. 객관적이고 합리작인 주장을 자신의 무지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자신의 수준에서 재단하고 정당화하는 주장을 보면 할말을 잃고 만다. 그 고집이 수준이하일 때는 더더욱 그렇다.  

이 세상에는 천차만별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외모만 그런 것이 아니다. 생각도 기호도 가치관도 천차만별이다. 민주주의 사회란 서로 다른 생각이나 가치를 이해하고 인정한다는 전제 하에 성립한 사회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적대시하는 사회는 획일적인 가치가 지배하는 암흑과 같은 사회다.


우리사회는 오랫동안 상대주의가 실종된 군사문화에 익숙해 왔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흑백논리로 붉은 색칠을 하면 승자가 되는 저질문화가 형성돼 왔다.

이러한 사회풍토에서는 합리성이 실종되고, 사회정의도 경제정의도 부정되는 강자의 논리가 지배하게 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상대방이 곤경에 처하거나 피해를 본다는 것 따위는 문제가 안 된다. 

국정교과서를 가르치는 교사이면서 '왜 특정인에 의해 선정된 지식이 가치로운가?'라는 문제의식조차 없는 교사도 있다.

가르치라는 것만 가르치는 것이 교사의 본분이고 역할이라고 믿는 교사도 있다.

단순히 남자이기 때문에 대접을 받아야 한다거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대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경영자의 입장에서 씌어 진 신문 기사를 노동자가 읽고 노동자는 경영자의 편이 되기도 한다. 기준이 실종된 사회에서는 원칙도 정의도 없다. 힘센 사람이 승자가 된다. 이런 사회에서는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이 '빼진 사람'으로 왕따 당하기 일쑤다.

물론 '왜라는 본원적인 회의'조차 외면당한다. 한나라당이 신문의 탈세문제를 놓고 언론 탄압이라고 펄펄 뛰고 있다. 탈세는 범법행위다.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이 범법행위를 정당화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탈세와 언론탄압은 다른 문제다. 이러이러한 정황에 비추어 이러한 근거에 의해 언론 탄압의 징조가 있으니 언론탄압은 정권연장을 위한 음모라고 한다면 맞다.


민주당이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것처럼 정권 재창출을 위한 전술로 언론문제를 거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은 조선일보를 비롯한 도덕성을 사실한 언론의 손을 들어 주어 반사이익을 얻으려는 속셈이 전혀 없는 것일까? 

봉건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에게 즐거움을 제공하는 존재로 또는 '노동력을 생산하는 존재'로 알고 있었다. 이러한 역할을 잘 수행하는 여성을 여성답다고 생각했다. 전생에 죄가 많은 사람은 여자로 태어나기 때문에 그러한 역할에 충실한 여성은 속죄의 길을 걷는다고 믿었다.

사립학교에 근무하는 교사 중 재단 이사장이 은혜로 자신이 교사 생활을 할 수 있다고 감사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이 교사로서 정당하게 노동한 대가로 임금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못 배우고 못나서 노동자가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노동이란 소중한 것이고 노동에 종사하는 것은 삶의 양식으로 긍지를 갖고 사는 사람도 있다.

난한 사람 중 자신이 무능해서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국가의 배분정책의 잘못이 불평등을 심화시켰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문제 청소년을 보는 시각도 개인의 도덕성의 결함 때문에 청소년문제가 발생한다고 보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 청소년들을 타락시키는 더 큰 원인을 제공한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법이 '지배권력의 유지를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법은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봉건적 가치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사람이 있고 원칙과 정의의 차원에서 정당성과 공평성이 지배하는 사회로 바뀌기로 원하는 사람도 있다. 이해관계의 차이 때문에 객관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못한 주장으로 새로운 피해자가 양산되고 있다. 그 피해자는 오히려 가해자의 편이다.

봉건사회의 여성이 그렇고 노예근성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사립학교의 교사가 그렇다. 노동자성이 없는 노동자가 그렇고 이데올로기의 본질을 이해 못하는 이 땅의 순진한 민초들이 그렇다. 인생이란 자기수준만큼 살수밖에 없다.

왜곡된 지식, 완전하지 못한 진리를 진리라고 믿고 있는 사람도 더불어 살아야 할 사람이다. 경직된 사고와 폐쇄적인 사고방식으로 마음을 열지 않고 사는 사람도 있고, 극단적인 이기주의에 빠져 사는 사람도 있다. 순간의 쾌락을 위해 신념도 철학도 없이 천방지축으로 헤매는 사람도 없지 않다.

모두가 잘못된 교육과 언론이 만들어 놓은 결과다. 교육이 교육답지 못할 때, 언론이 언론의 역할을 못할 때, 개인도 사회도 깊은 병에 걸리고 만다. 여기에 순수성조차 실종되면 회복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 진다. 잘못된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들, 형식주의자, 교조주의자, 감각주의 문화의 희생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교훈이 생각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신약 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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