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사랑의 다른 표현입니다. 불의를 보고 외면하지 않고 분노한다는 것... 관심이 없는, 사랑이 없는 사람의 마음에는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 제자들을 사랑하는 교사들만이 그런 용기가 생겨나는게 아닐까요?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이 교육의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면 자기희생을 각오하고 저항하는 게 옳을까요? 아니면 좋은게 좋다거나 시간이 지나면 바뀔 것이라고 체념하고 적응하는 사람이 옳을까요? 자기희생을 각오하고 불의에 저항하는 것은 용기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교육자로서의 자세가 아닐까요?

교직에 몸 담은지 이제 겨우 10년차 교사가 책을 펴냈습니다. 그것도 학교에는 왜 이상한 선생이 많은가?(생각비행)라는 교직사회의 현실을 고발하는 도전적(?)인 책을...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교직생활 겨우 10년차인 이 젊은 선생님의 눈에 비친 현실을 왜 다른 선생님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안 보인게 아니라 보고도 모른체 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말입니다. 

저자 김현희선생님의 눈에 비친 이상한 선생은 어떤 교사였을까요? 감정기복이 너무 심해 학생들과 동료교사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교사, 제자들을 편애하는 교사, 정서장애가 아닌가 할 정도로 자기감정을 주체 하지 못하는 교사, 권력에 취한 관리자.... 돈을 밝히고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교권과 권위를 구별 못하는.. 권위에 순종하고 따르는... 그런 교사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교사라고 다 완벽한 인격자일 수 없습니다. 인간적이든, 정서적이든 조금씩은 다 자기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결함이란 직장에서 집단생활을 통해 승화되고 성숙해지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정작 교사를 품고 있는 학교라는 교직사회의 환경, 그 환경이 어떤 분위기인가, 또는 교사를 선발하고 양성하는 기관에서는 문제가 없는지... 그런 눈으로 보지 않으면 학교사회의 병폐는 교사 개인의 잘못만이 부각되어 책임을 떠맡게 되는 것입니다.

보통 자기가 몸담고 있는 직장의 모순을 얘기하면 직장을 망치려는 상종 못할 인간으로 매도되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그 모순을 덮고 감추는게 그 직장을 망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판단, 손가락질 받으면서도 모순을 개선하겠다는 용기 있는 사람만이 그 사회를 건강한 사회로 만들 수 있습니다. 똑똑한 선생님... 학생들에게 미지의 세계를 깨우쳐 주는 안내자인가 아니면 자기가 맡고 있는 제자들의 삶을 안내하는 인격자인가에 따라 교사의 역할은 크게 달라집니다.

이 세상에는 완벽한 사람도 없지만 완벽한 사회도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직장이든 교직사회든 그 사회는 지향하는 목적에 따라 구성원들이 적응방식이 달라 질 수 있습니다. 교직사회는 구성원인 교사의 정체성도 문제지만 그 사회의 정체성 즉 학교가 교육하는 곳인가 아니면 학생 개인을 좋은 학교로 보내는 역할을 하는 곳인가의 여부에 따라 교사들의 정체성도 교직사회의 분위기도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쉽게 혹은 자기중심적으로 환경에 적응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가 아니면 이해관계로 세상을 보는가의 차이입니다. 똑 같은 학교사회를 보더라도 내 자식같은 제자라는 눈으로 혹은 삶의 안내자라는 눈으로 보는 현실은 똑같이 보일 수 없습니다. 학교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 승진문제, 관료제의 문제, 지식으로 서열매기는 성적지상주의, 교과서 특히 도덕과 같은 교과서문제, 학교운영위원회며 학교급식문제 등등... 솔직히 학교사회는 문제 아닌게 없을 정도로 깊은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교직사회의 구성원들이 그 사회의 모순된 현실에 적응하고 동화되어 타협하는가 아니면 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저항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그 사회는 크게 달라집니다. 교총과 같이 현실과 타협하고 순종하기를 강조하는 단체가 있는가 하면 전교조와 같이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 불의를 보고 저항하려는 교육단체도 있습니다. 어떤 단체에 가입해 활동하는가에 따라 본인은 물론 교직사회도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우리는 권력에 취한 정치인들이 교육계를 권력유지를 위한 도구로 이용해 왔습니다

식민지 종주국인 일본이 그랬고 독재자들, 유신정부가 그랬습니다. ‘교육은 중립적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로 교사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침묵을 강요해 왔습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보고 듣고 느끼고 있는 문제지만 그 모순에 저항하려는 용기 있는 선생님의 분노로 풀어낸 책 왜 학교에는 이상한 선생들이 많은가?’를 읽으면 학교를 바꾸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마음이 생겨날 것입니다. 자녀를 학교에 맡기는 엄마들과 선생님들에게 꼭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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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학생들을 생각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가족들의 아픔에 함께 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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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세상읽기2011.05.07 05:00



“청주에 이사를 왔는데 모충동이라는 동네가 있더군요. 애국지사를 추모하는 사적이 있는가보다 하고 지나쳤는데, 한번은 모충사라는 사당이 있다는 걸 알고 알아 봤더니 동학농민군에게 희생당한 관군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더군요. 사당이야 사적으로 역사적인 보존의 가치가 있지만 모충동(慕忠洞)이라는 동명이 그대로 있는 게 이해가 안 됩니다”

청주시청에 전화를 했더니 “그렇다면 장충당공원도 이름은 바꿔야하지 않습니까?”하는 것이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 “장충당의 뜻과 동학도를 가해한 관군을 추모하는 모충이 같은 뜻인가요? 그렇다면 동네이름을 이완용동(洞), 최남선로(路)라고 바꾸어도 괜찮겠네요?” 했더니 자신은 잘 모르겠단다.

시민운동을 하시는 분을 소개받아 1996~7년도에 주민들에게 이름을 바꾸자는 설문조사를 한 일이 있었고, 당시 일부시민들과 관청에서 반대 목소리가 높아 현재까지 동네 이름을 ‘모충동’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논리학에서 모순(矛盾)이란 두 개의 명제가 동시에 참이 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혁명이 긍정되기 위해서는 반혁명은 부정되어야 옳다. ‘모순(矛盾)’과 ‘반대관계’는 다르다. 의미가 상반되면서 중간에 다른 외연의 개입이 불가능할 경우를 ‘모순관계’(있다/없다)라 하며, 의미가 상반되면서 중간에 다른 외연의 개입이 가능할 경우 '반대관계'(검정/흰색)라고 한다.

청주시내 모충동을 지나다 보니 모충사(慕忠祠)라는 곳이 있어 궁금해 올라갔더니 ‘헉~ 이게 웬 일...’ 모충동이라는 지명이 모충사에서 유래했다는 걸 알 게 되었다.


모충사(慕忠祠)를 보는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모(그릴 慕)란 사모하다(思慕--) 뒤를 따르다, 생각하다, 높이다, 우러러 받들어 본받다...라는 뜻이요, 충(충성 忠)이란 충성 공평(公平), 정성(精誠), 공변되다'''란 뜻의 글자니까, 모충(慕忠)이란 충신의 업적을 기리는 사당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인터넷을 검색했더니 모충사(慕忠祠)란: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대전 방면에서 집결한
동학군을 해산시키기 위하여 충청병영의 영관(領官) 염도희(廉道希)가 교장(敎長) 박춘빈(朴春彬)과 대관(隊官) 이종구(李鍾九) 이하 70명의 병사를 이끌고 출진하였다가 청원군 강외면 지역에서 모두 전몰하였다. 이들 장졸들의 순절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1894년 11월 전임목사 임택호(任澤鎬)가 남석교 밖에 모충단(慕忠壇)을 설치하였다.

1903년 안종환(安宗煥)의 건의로 순직한 장교의 증직과 모충단의 단호가 하사됨에 따라 당산에 단을 쌓고 제사하였으며, 그 뒤 기념비각도 건립하였다.
경내에 동학군 격퇴에 공이 컸던 병마절도사 홍재희(洪在羲)의 사적비가 있으며, 현재 모충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라고 설명해 놓았다.


동네이름을 ‘이완용동, 최남선 거리...’ 이렇게 지으면 동네사람들이 좋아할까? 서두에서 잠간 언급했지만 4·19가 긍정되기 위해서는 이승만정부는 부정되어야 한다. 그래야 혁명으로 명명(命名)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동학이 혁명이기 위해서는 혁명군을 학살한 관군은 가해자가 되는 게 맞다. 그런 사실(事實)이야 사적으로 보존하는 게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 그런데 동네 이름까지 그대로 두고 기념한다는 것은 역사의식이 있는 시민이라면 당연히 거부하는 게 맞지 않을까?

백과사전에 보면 모충사라는 곳이 몇군데 있다. 제주도의 모충사는 한말 의병들과 항일 투쟁가 및 김만덕의 넋을 기리고자, 내외도민 17만여 명이 성금을 모아 사라봉 기슭에 세운 사당이다. 또 하나. 여주에 있는 모충사는 조선 전기의 문신 조계상(曺繼商)과 그의 5세손이자 문신인 조한영(曺漢英)의 불지전사판(不之典祠版)을 모시기 위해 임진왜란 때 후손 조경인(曺景仁)이 낙향해 세웠고 전라북도 정읍시에 있는 모충사 등은 개인이나 지역에 공이 있는 분들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그러나 청주의 모충사는 성격이 다르다.


부정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부정은 부정되어야 한다. 동학이 혁명이기 위해서는 관군은 충신일 수 없다. 동학도 긍정되고 관군도 긍정되는 역사란 멍청한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청주시내 수많은 학교에서 모충사(慕忠祠)를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 모든 사실(事實)은 사실(史實)이 아니다. 사실(史實)이란 가치 있는 역사다. 사실(事實)을 살아 있는 역사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없는한 역사는 사실(史實)일뿐이다. 동학혁명의 격전지이기도 했던 청주에 모충이 동명(洞名)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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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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