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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관련자료/교육칼럼

무릎 꿇지 마라 교사여!

by 참교육 2009. 7. 11.

무릎 꿇지 마라 교사여!

 

 

무릎 꿇지 마라,교사여.

-도종환-

 

밥을 먹다가 목이 메어 숟갈을 내려놓는다.

생각을 지우고 지우려 애쓰다 다시 그대가 무릎을 꿇었다는 생각에 이르자

가슴이 미어져 밥을 떠 넣을 수가 없다.

손이 떨려 밥상 위에 흘리고 만 밥알과 국물자국을 행주로 훔치려는데

얼룩져 잘 보이지 않는다.

터져 나오려는 그 어떤 것을 참느라 수돗물을 틀어놓고 오래 눈을 감고 그대로 서 있었다.

참혹함을 대신하는 눈물일 수도 있고 견딜 수 없는 분노일수도 있는 그것이

혹시 감정의 덩어리일까 봐 마음을 다독인다.

 

무릎 꿇지 마라,교사여.

 

깊게 사유하고 당당하게 행동하고 책임져라.

가르치고 꾸짖고 꾸짖은 그 말과 함께 물러서지 말고 서 있어라.

그대는 아이의 일생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자기 생을 던져,온몸으로 아이의 일생을 책임지는 사람이 교사다.

일생의 아주 중요한 시기를 함께 하며 아이의 생을 한 단계씩 위로 밀어 올리는 사람이다.

그대 자신이 교육과정이다.

그대의 언어,그대의 행동,그대의 가르침이 움직이는 교육과정인 것이다.

그대가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으면

이 나라의 교육과정과 교육의 근본이 무릎을 꿇는 것이다.

 

무릎 꿇지 마라,교사여.

 

우리 주위엔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학부모가 있고,

우리보다 더 훌륭한 지식인들이 있으며,

우리보다 더 큰 힘을 가진 권력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가 밥알을 흘리는 어지러운 식탁 옆에 있지 않고,

오줌 싼 바지를 갈아입히는 지린내 옆에 있지 않으며,

힘겨워하는 산수공식과 딱딱한 책상 옆에 있지 않다.

아이의 구체적인 고민과 어려움 곁에 있지 않고,

아이의 현재와 미래를 책임지기 위해 아이 옆에서 고뇌하며 있지 않다.

교사는 아이의 현재와 미래를 책임지는 사람이다.

아이의 인격,아이의 고민,아이의 성장,아이의 성공과 실패를 책임지는 사람이다.

그러니 무릎 꿇지 마라,교사여.

 

무릎 꿇지 마라,교사여.

 

언제나 청정하고 떳떳하라.

아이들 앞에서고 학부모 앞에서고 진실하고 용감하라.

권력 앞에서고 역사 앞에서고 부끄럽지 마라.

진정으로 아이들을 먼저 생각하고 아이들을 위해 행동하라.

내일도 식사습관을 바르게 갖게 하기 위해 반성문을 쓰게 하고

공동체와 공공선을 생각하는 아이로 자라게 하기 위해 회초리를 들어라.

아이들을 힘들게 하는 잘못된 교육구조를 보면

눈 감지 말고 그들에게도 용기 있게 요구하라.

아이들이 편하게 밥을 먹고 즐겁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교장에게도 요구하고 교육청에도 요구하라.

두려우면 힘을 합쳐 요구하라.

이이들을 먼저 생각하면 한 시대도 하느님도 당신 편이 되어 줄 것이다.

 

무릎 꿇지 마라,교사여.

 

그대가 무릎을 꿇고 있는 동안 이 땅의 모든 교사가 무너진다.

그대 뒤에서 모든 교사가 용기를 잃고 넘어지며 자괴감으로 가슴을 친다.

무릎을 꿇어야한다면 차라리 교단을 내려와야 한다.

무릎을 꿇지 말고 교단과 교권을 지켜야 할 사람이다, 당신은.

책임져야 할 사람이고,지금도 아이들과 교실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다.

힘이 없고 가난해도 당신만이 아이들을 책임질 수 있다.

그래서 교사이고 그래서 당당해야 하는 것이다.

무릎 꿇지 마라,교사여.

 

무릎 꿇지 마라,교사여.

 

Ⅰ. 시작하면서

 

유모차에 타고 있는 아이의 손에 휴대폰이 쥐어져 있고 어머니는 태연하게 유모차를 끌고 가는 모습을 가끔 본다. 이 어머니는 휴대폰의 전자파가 아이에게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안다면 아이 손에 휴대폰을 쥐어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휴대폰뿐만 아니다. 검증되지 않는 유전자변형식품(GMO)이며 식품첨가물이 성장기 아이들의 인체에 어마나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안다면 그런 음식을 먹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내가 가르치는 교과목, 그 지식이 아이들에게 오히려 독이 된다는 것을 안다면 교과서를 암기시키는 교사로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반기를 들고 나설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제자를 운명론자가 되도록 만들거나, 힘 앞에 복종하도록 순치시키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방관자가 될 교사는 많지 않을 것이다. 모든 책이 유익하지 않듯이 ‘교육이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고민해 본 교사는 얼마나 될까? 교문 입구에 적힌 정식, 근면, 성실은 이데올로기가 포함되어 있는지의 여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일이 있는 교사는 얼마나 될까?

‘나는 아이들의 삶을 책임지고 있는 교사’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줘 ‘약이 되는지, 독이 되는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Ⅱ. 이 땅의 교사는 교육을 할 수 있는가?

 

1. 착각은 자유라지만....

 

사람은 자기 수준만큼 누리고 산다. 단체도 예외가 아니다. 학교 사회의 구성원인 교사가 교과서를 가르치는 게 교육이라고 생각하고 지식을 암기시키는 일에 만족한다면 학교는 교육의 장이 될 수 없다. 교육부가 시키는대로 교장이 시키는대로 운명적으로 사는 교사가 있는 학교에는 창의적인 교육도 민주적인 교육도 불가능하다.

개인의 삶의 질이 개인의 수준이듯 단체나 국가의 삶의 질은 그 구성원이다. 철학이 없는 교사들로 구성된 사회는 교사 자신도 불행하지만 나라의 장래를 이끌고 갈 2세 국민들의 미래도 암울하다. 착각은 개인의 불행으로 그치지만 교사는 제자를 그리고 민족의 장래를 불행하게 만든다.

 

1) 부끄러웠던 교사생활

1969년 첫 발령지 초등학교 동창회에 초대 받았던 일이 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같이 동화를 들려 준 좋은 선생님’ 40년이 지난 제자들의 ‘나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 동화가 어떤 동화였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옳고 그른 것, 좋고 나쁜 것’에 대한 분별력이 없었던 내가 아이들에게 들려준 얘기란 ‘미국의 시각에서 아니면 자본의 시각에서, 혹은 종교적인 이데올로기가 포함된 내용’이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다행히 제자들은 야생초처럼 건강하게 아버지 어머니로 혹은 할아버지, 할머니로 살아가고 있었다. 부끄러운 교사. 보다 많은 지식을 암기하도록 끊임없이 주입하고 줄 세우고 희열을 느끼던 성실한 교사(?)였던 나. 나는 부끄러운 교사였다.

2) 나는 한 때 ‘교사’였던 시절도 있었다.

1989년을 전후한 한국사회는 민주화의 열기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 거대한 태풍은 무풍지대였던 학교에서도 바람으로 다가왔다. 교과서를 덮고 ‘너희들도 똑같은 사람이다!’ 메시지는 간단했다. 여자로 태어나 운명적으로 순종이 미덕으로 알고 살아야 했던 아이들에게 이 작은 메시지 ‘너희들도 똑같은 사람이다’이 한마디가 그들의 운명을 바꾸고 있었다.

이 한마디가 잠자는 아이들에게 들씌워진 위선의 껍질을 벗기고 ‘시비’를 가리고 ‘분노’할 줄 아는 바람으로 만들 수 있었다. 지식을 암기시키고 줄 세우든 교사가 아니라 그들의 순수를 배우고, 삶을 안내하고 토론하는 교사. 교사가 본분을 다할 때 이보다 더 행복한 교사는 없다.

2. 교육인가? 야만인가?

 

거꾸로 된 현실을 사는 양심적인 사람들에게 순종을 강요하는 것은 거세(去勢)나 다름없다. 청맹과니로 만드는 교육은 앞을 보지 못하게 하는 마취요, 야만이다. 민족 반역자가, 돈이 주인이 된 세상, 그들이 선이라고... 순종하라고 가르치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어떻게 학교만 교육을 하는가? 어떻게 교사만 교육을 하는가? 이 땅의 모든 구성원은 2세들에게 교사요, 삶의 안내자다. 학교의 구성원 모두는 교육자다. 그런데 어떤가? 모범을 보여야할 어른들이 아이들을 ‘인간’이 아니라 돈벌이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노동 착취의 대상으로 길러지기를 바라고 있다면 교사의 할 일은 무엇인가?

옳은 것은 ‘옳다’고 가르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가르쳐야 한다. 불의를 보면 분노할 줄 알고, 감동할 줄 알고, 감사할 줄 알고, 사랑할 줄 알게 해야 한다. 내가 소중한 존재라는 것, 나의 친구가, 내 부모가 소중한 존재라는 것, 나의 민족, 내가 몸담고 사는 고장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도록 가르쳐 줘야 한다.

Ⅲ. 이 땅의 교사는 교육을 할 수 있는가?

 

1. 교육은 ‘인간을 사회적인 존재로 키우는 일’이다.

‘환경결정론자들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사회생활을 통해 축적한 문화를 흡수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적이 된다.’고 주장한다. 바꿔 말하면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답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땅의 부모들, 이 땅의 교사들은 인간을 사회적인 존재로 키우는가? 아니면 개인적인 존재로 키우고 있는가? 아니, 키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는가? 성장과정에서 보고 배우는 그 어떤 것도 교육적인 것은 없다. 학교폭력은 사회상의 반영이며 자본주의의 구성요소다.

 

2. 학교는 교육이 가능한가?

이 땅의 교사들은 내가 맡고 있는 아이들이 이대로 자라면 ‘인간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가? 이기적이고 관념적 인간을 만드는 경쟁교육으로 인간 교육은 불가능하다.

교문을 한발짝만 나서면 교육내용과는 정반대현상을 만나 아이들을 이중인격자로 만들고 있다. 학교폭력을 비롯한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 아이들을 통해 교실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3. 교육은 학교에서만 하는 게 아니다.

무너진 가정, 어른들의 부도덕한 생활, 아이들을 돈벌이의 대상으로 이용하는 상업주의는 이이들을 나락으로 내몰고 있다. 수구언론은 ‘무너진 교실’을 탓하며 교사들의 무능을 질타하고 있다. 무너진 교육이 교사 때문일까? 교육은 교실에서만 하는 게 아니다. 가정과 학교 그리고 사회 삼위일체가 교육을 의도적으로 하지 않으면 결코 교육은 성공할 수 없다.

 

4. 교사인가 노예인가?

21세기 교사! 로마시대 노예로 돌아갈 것인가? ‘농부는 농사나 짓고...’ ‘노동자는 열심히 일이나 하고...’‘교사는 아이들이나 가르쳐라’ 사회유기체설에서 말하는 사회란 이렇게 기능론을 정당화시킨다. 사회란 각자가 맡은 일만 열심히 하면 균형을 이뤄 사회가 발전한다는 논리다.

만들어 준 교과서나 열심히 가르치는 교사, 내 자식 출세시켜주는 교사, 이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잊지 못할 선생님이 존경받는 교육은 병든 교육이다. 가르치라는 내용만 전달하는 교사는 교육자일까?

 

5. 교육을 위기로 몰고 간 주범은 누군가?

약을 먹고 효과가 없다면 약을 조제한 약사의 책임이 클까? 아니면 제약회사의 책임 더 클까? 물론 교육이 무너진 책임이 교사에게 없다고 할 수 없으나 보다 큰 책임은 교육내용을 만들고 국정교과서라는 딱지까지 붙인 제약회사(교육부)의 책임은 자유로울 수 없다. 교육의 정의조차 내리지 못하는 교육부가 교육위기의 책임을 교사에게 전가하기 혈안이 된 사회.

여기다 내 아들 출세를 위해서라면... 어떤 불의라도 용서하는 어머니의 사랑(?)이 있고, 돈이라면 청소년을 돈벌이의 대상으로 만드는 상업주의 또한 주범이 아니라고 발뺌할 수 없다.

잘잘못을 가리고 바로 잡아야할 언론은 한 술 더 뜬다. 학원을 운영하면서 ‘사교육비를 잡아야 한다!’고 기염을 토하는 언론. 언론이기를 포기한 사이비 언론이 있어 교육은 더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Ⅳ. 교육운동, 성공인가 실패인가?

 

전교조는 찹립이래 최대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전교조는 왜 위기인가? 이명박대통령이 전교조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칼질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서민들이 등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교사들로부터 초기와 같은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닐까?

전교조를 이 지경으로 만든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1. 비판을 허용하지 않은 교육운동

흐르지 않는 물은 썩는다. 모든 운동이 그렇지만 전교조 또한 비판을 용납하지 못하고 있다. 연단을 거치지 않는 쇠붙이는 겉은 멀쩡하지만 시련을 만나면 쉬 부러지거나 부서진다. 전교조가 국민들로부터 외면 당하게 된 근본 이유를 ‘교원 평가’ 때문이라는 게 중론이다. 교원평가가 국민들의 정서에 반하는 정책이라는 것을 선배들은 왜 침묵했을까?

2. 정파싸움이 만든 예정된 실패

비판을 욘납하지 못하는 조직과 연관된 또 하나의 취약점은 정파적인 입장의 차이다. 사업의 선순위를 채택하는 과정에서 제국주의문젠가 아니면 재벌구조의 문젠가가 NL, PD로 대결하면서 끝없는 대립과 반목을 반복해 왔다. 결국 민주노동당은 진보신당이 탈당, 새롱누 정당으로 춟머했지만 민주노총을 비롯한 대부분의 진보운동이 한 지붕 두 가족 살림을 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전교조도 현 집행부와 입장의 차이를 가지고 있는 교찾사의 힘겨루기 양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3. 권력의 본질에 대한 객관적 이해 부족

정책의 부재. 정세판단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의 차이도 문제지만 자본주의라는 체제에 대한 이해가 전망의 실패로 정파간의 입장의 차이로 사업의 실패,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4. 조합원 교육을 외면한 지도부의 오류

전교조 창립 초기, 지도부들의 한결같은 소망이 ‘전교조 학교’를 만는 일이였다. 권력의 통제에서 벗어나 학교다운 학교를 만들고 싶은 꿈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런데 그 꿈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몇 억정도면 폐교를 활용한 대안학교를 만들어 전교조의 이념을 실현하는 꿈같은 학교를 만들 수도 있을텐데....

5. 교사들의 한계

참교육은 아이들을 향한 논제가 이니다.교사들의 자질문제, 교육자로서의 철학문제 또한 방치할 수 없는 한계다. 교육의 위기를 말하면서 교사들에 대한 비판 또한 만만찮다. 인간적인 한계도 있겠지만 교사 선발이나 양성과정에서 잘못되도 뭔가 한참 잘못된게 있다. 교원양성정책의 한계가 교육현장으로 이어져 방관하는 교사, 기회주의적인 교사가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대안은 무엇인가? 교원들의 재교육문제다. 일당 백! 조직은 구성원의 수준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전교조는 조합원 교육을 방기했고 그 결과 오늘날과 같은 취약한 조직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는 회피할 수 없는 지도부의 책임이요, 오류임을 부인할 수 없다.

 

.마치면서

 

‘꿈을 심어주는 교육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민족과 역사 앞에 죄인으로 남을 것인가’이것이 오늘날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사의 고민이다. 교사의 고민이 교원의 자질문제라면 교육에 대한 희망은 교육운동을 통한 교육개혁이다. 위기에 처한 전교조는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권력으로부터 짓밟히고 학부모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초라한 모습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인가? 아니면 국민들로부터 성원과 사랑을 받는 제 2의 교육운동단체로 거듭 날 것인가?

전교조의 진로와 정체성에 대한 고민! 그건 조합원 모두가 함께 풀어야 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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